1장. 조선교육의 특징
1. 조선 교육정책의 방향
1) 관학의 정비와 부흥
조선인 인재의 육성과 백성의 교화를 중앙에 국립대학인 성균관과 이의 부속기관 격인 중등수준의 4학을 설립하고, 지방에는 각 행정단위에 329개의 향교를 설치하였다.
2) 교화정책
① 소학과 주자가례의 중시
교화는 사회
3) 학생 : 서원의 학생은 원생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서원 입학조건은 사족이나 서류를 막론하고 학문에 뜻이 있는 자로서, 유생들의 10명 이상 추천을 받은 자로 하고 있다. 그리고 생원․진사는 무조건 입학을 허가하였으며, 다음에 초시 합격자를 입학시키도록 하였다.
4) 교육과정 : 서원의 교
나는 후대 대한민국 인천에 사는 조선 사람으로 성씨는 인천 李(이)가로 그 이름이 建宇(건우)이다. 지금부터 16세기 조선 양반으로서 나의 일생을 그리려 하며 나의 출생배경과 입신, 출가, 양반으로서 성가(成家)에 대해 자세하게 알리려고 한다.
“인천 이씨(李氏)의 기원은 김해 허씨(金海 許氏)와 연
생원시 또는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은 누구나 성균관에 들어가 약 1년간의 교육과정을 거쳐야 문과에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균관 유생이 모자랄 때에는 4학에서 升補試에 합격한 사람으로 보충하게 되어 있었다. 승보시에는 15세 이상된 4학 유생으로 품행이 단정한 사람만이 응시할 수 있었다. 이
생원·진사시는 초시, 복시로 나누어 있었다. 대과시험은 예조, 성균관, 장악원, 한성부 등에서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로 치러졌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먼저 시험 10일 전에 녹명소에 이름을 올리는 ‘녹명’이 이루어진다. 그 뒤 각자 시험지를 구입하여 본인의 관직, 이름, 본관, 거주지, 부조·
생원·진사시, 성균관에서는 문과에 상응하는 교육과정을 제공하였다. 학교를 통해 인재를 배양하고, 과거를 통해 그들을 등용한다는 것이 조선시대 교육과 과거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과거 공부는 문학, 역사, 철학에 대한 소양을 갖추는 일이지만, 실제 합격을 위해서는 응시하는 시험의 종류에 맞추
생원ㆍ진사시의 응시자격이 박탈되어 청요직에 나갈 수 없었다. 만약 무과에 급제하거나 음직으로 관료가 되더라도 품계에 한계가 있었다. 또는 기술관이 되거나 중앙과 지방의 잡직을 얻어 사족양반으로부터 차별을 받았다. 그 외의 서얼들은 무직상태로서 빈곤과 질병으로 외롭고 괴로운 삶을 살아
생원·진사시는 거쳤으나 집안의 묘지 문제로 말미암은 상소사건 등을 빌미로 35세 이후부터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실학사상에 몰두하다가 44세 되던 해 여름(정조 4년, 1780)에 청나라 건륭제의 70회 탄신을 축하하러 가는 진하별사를 따라 압록강을 건너 성경, 산해관, 북경을 거쳐 열하까
진사시이다. 주자학을 신봉하는 신진 유학자들은 사장을 배격하고 경학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집권하게 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사장시험인 진사시보다 경학시험인 생원시를 중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과 시험에는 초장강경(初場講經)이 실시되었다. 제 1차 시험에서 경서를 시험보였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