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1920년대의 신간회
1) 1927년 2월 15일 신간회 창립, 조선일보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전선조직. 강령 ①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②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③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배제함
2) 1928년 말 지회 수 143개, 회원 2만 명, 1930년경 회원 4만 명
3) 신
Ⅰ. 1910년대의 독립운동
미주한인사회에서 박용만 등이 제기한 ‘정부’수립론은 국외 독립운동기지화의 핵심 거점인 노령 연해주 지역에서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64년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노령 연해주의 한인사회는 1910년의 ‘합방’까지 20여만 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황무지 개척과 러
조선공산당 갖고 있는 특수한 사회적 결합을 개조할 것에 대한 의무를 부가하는 바이다. 노동자와 농민을 더 많이 당내에 끌어들여야 한다. 새 중앙집행위원회와 그 밖의 당 지도기관에 노동자 출신을 더 많이 배치해야 된다.
전국적 대중 조직의 정비: 조선노농총연맹의 분립: 조선청년총동맹의 신
조선지광(朝鮮之光)》에 취직하는 한편,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에 가맹했다. 31년 카프에 대한 제 1 차 검거로 구속되었다가 다음 해 석방되었다. 45년 월북하여 이듬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초대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최고인민회의부의장, 조·소친선협회위원장, 문학예술총동맹위원
Ⅰ. 1920년대의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1925 - 1929년간은 재일노총이 결성되어 일본각지의 한인노동단체들이 이를 구심점으로 결집하여 주체적으로 활동한 시기이다. 재일노총 역시 산하 노동조합의 조직과 활동에 기반을 두고 결성된 노동단체가 아니라 아직 조직화되지 않은 재일한인노동단체의 결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에게 당창건을 그 어떤 활동보다 우선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촉구한 것으로 여겨졌고 국내 사회주의 그룹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 결과 이미 1923년 서울파에 의해 창립된 고려공산동맹은 당시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노농운동과 청년운동 등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것에 고
노농운동이 급격히 발전했다. 1921년 9월 부산의 부두노동자 5,000여 명의 총파업, 1923년 8월 평양의 양말공장노동자 2,000여 명의 파업, 1923년 9월부터 1년이 넘게 전개된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 소작농민의 투쟁, 1929년 1월부터 3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원산 총파업, 그리고 1930년 1월 3,000여 명의 여성노동자
조선의 방향을 모색하게 했다. 청년학생들은 자신의 일터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시대의 모순을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느꼈고 청년학생의 양심은 분노를 토로하게 했고 또 실천하게 했다. 청년학생조직이 사회운동조직의 영향을 받기도 했고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빠르게 받아들
조선공산당으로 승인받으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3년 7월 서울에서 홍명희, 김찬 등은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하여 강습회와 토론회를 열고 책과 잡지를 펴냈다. 이들은 1923년 5월 꼬르뷰로(고려국) 국내부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신사상연구회는 1924년 11월 화요회로 이름을 바꾸고 행동단체로
조선공산당이 결성되는 과정, 뒤이은 수차례의 검거사건과 1928년 「12테제」에 의해 조선공산당이 사실상 해체되기까지를 다룬다.
사회주의 이념 도입과 확산
(1)사회주의이념 수용·확산의 여러 계기
1920년 초반 우리나라에 사회주의 이념이 도입괴고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다음과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