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되었다. 즉 후삼국의 성립을 가능케 한 것은 지방 호족세력의 등장 때문이었다. 이러한 역사는 후고려의 기반을 계승한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Ⅱ. 나말여초의 변혁을 주도한 6두품과 호족
1. 육두품
신라에는 골품제라고 불리우는 엄격한 세습적 신분제가 있었다.
고려초 왕건의 민족융합정책
태조가 건국한 이후 그에게 부과된 가장 큰 문제는 호족들을 회유․억압하는 문제였다. 그가 새로이 개국하였다고 하지만 지방 각처의 호족들은 후삼국의 혼란 시대와 마찬가지로 독자적 무력과 경제적 기반을 보유한 채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왕건이 즉
1. 후삼국과 고려
- 신라는 하대에 들어오면서 정치적·경제적 혼란으로 인해 몰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는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으로 인한 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경제적으로는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로 인한 농민들의 궁핍한 생활이 이어졌다.
진성여왕을 전후로 하여 왕위 쟁
Ⅰ. 나말여초의 시대적 배경
신라 中代를 마감하고 하대에 접어들면서 진골귀족들간의 권력 다툼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혜공왕 때의 대공의 난, 헌덕왕 때의 김헌창의 난, 흥덕왕 사후 일어난 상대등 김규정과 시중 김명의 대립은 불과 3년 사이(836~839) 희강왕․민애왕․신
모든 국가가 그렇듯이 우리나라의 역사도 분단과 통일을 거듭하였다. 먼저 삼국으로 갈라졌던 나라를 신라가 통일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후삼국으로 분열되었으나 고려가 다시 이를 통일하였다. 기존의 신라에다 후백제, 태봉이란 나라로 분리되었으나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이를 재통일했던 것
미술 사전적 의미의 조각(彫刻)을 살펴보면, 조각(sculpture)이라는 어원은 라틴어 sculpere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말은 날카로운 연장을 가지고 단단한 재료를 새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어에서 연유하는 조각의 다른 표기인 plastik이란 단어는 좀 더 부드러운 재료를 손이나 또는 도구로
1절 신라 하대의 사회 변동
진골귀족의 군사 정변으로 혜공왕이 시해되면서 중대가 막을 내리고 하대가 시작되었다. 태종무열왕부터 시작하여 직계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중대와 달리, 하대에는 진골 귀족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극렬해지면서 왕권이 흔들리고 중앙 집
II-1. 신라말기(후삼국 시대)의 왕건, 견훤, 궁예
1. 궁예
정치적 감각: 구고구려계 지방 세력을 자신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옛날에 신라가 당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평양 옛 서울이 황폐해져서 풀만 무성하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으리라.”고 말하는 등 고구려 부흥 주
1.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 통일
송악(개경) 출신 태조 왕건
→ 918년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오름
국호를 고려(高麗)로 칭함(고구려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국호)
935년 신라 합병(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항복)
936년 후백제 점령 → 후삼국 통일
발해 유민을 대거 받아들이면서 국력 신장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