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운동과 한국교회] 31운동과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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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3.1운동의 배경과 과정

-1905년 강제적으로 맺어진 을사늑약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맺은 조약인데, 이것은 외교권 뿐 아니라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10년 8월 한일 병합조약을 강제적으로 체결함으로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기독교 계통 집회가 나타나는 모습으로 나라의 운명 때문에 방성대곡의 기도회가 일어났다. 한편으로는 폭력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기독교인들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는 매국노를 암살하려하는 사람 중 기독교인이 상당히 많았고, 특히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또한 기독교인이었다. 당시 정치단체인 서북학회, 신민회, YMCA에는 대부분이 기독교인들로써 조직화되었다.
1915년에는 포교규칙의 법령으로 인해 일제는 종교에 대해서 간섭하고 탄압할 수 있는 합법적인 명분을 얻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포교자는 자격증을 갖추어야 하고, 교회당이나 포교소의 설립이나 변경에 대해서는 총독의 허가를 받게 하는 법령이었다. 그로인해 교회의 경우 전도집회, 사경회, 부흥회, 기도회, 예배 때에도 일본 경찰의 감시 하에 방해를 받았고, 설교나 기도 내용 중에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트집을 잡히기도 했다. 이만열, “3.1운동과 한국 기독교”,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제34권 제3호 (통권 제375호) 1990.3, page(s): 116

1915년 포교규칙과 함께 일제는 같은 해에 개정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하여 학교에서 예배와 종교교육을 금지토록 하고, 모든 수업을 일본어로 하도록 강요하고, 일본인 교사를 강제로 두게 한다. 829개에 달하던 종교계 사립학교가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298개 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이만열, “3.1운동과 한국 기독교”,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제34권 제3호 (통권 제375호) 1990.3, page(s): 116

일제가 종교계, 특히 기독교와 천도교를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3.1 운동을 기독교와 천도교가 주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한데 당시 조선땅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조직체가 바로 종교계였기 때문이다. 이미 조선에는 통신(우편) 및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가 없는 상태이었으며 이런 시대에 비록 포교규칙으로 일제의 감시를 받기는 하지만 그래도 종교단체, 특히 교회는 매주일, 매 새벽마다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중요한 장소였던 것이다. 이런 배경 하에서 3.1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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