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정치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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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대왕의 정치평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왕’ 하면 떠오르는 왕은 세종대왕이다. 그만큼 세종대왕은 우리나라에가 가장 추앙 받는 왕 중에 하나이다. 세종대왕이 추앙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 훌륭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과학 기술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력을 튼튼히 하고,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제 이런 훌륭한 업적들에 대해 살펴보고 거기에 대한 평가를 내려 보겠다.
본론
세종대는 왕권이 안정되고, 문화가 찬란히 발전했던 우리민족의 황금기였다. 세종대왕은 왕도 정치를 유교 정치의 이상으로 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황희와 맹사성 같은 훌륭한 신하를 재상으로 가까이 두고 6조 직계제 대신에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하였는데 이 의정부 서사제는 6조 직계제와는 달리 6조의 업무를 의정부에서 심의 후 왕의 결제를 받는 것으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교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고, 군사적으로는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두만가에 이르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 지었다. 세종은 유교를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 침투시키려고 노력한 왕이다. 그는 우선 왕실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하여 국가 행사를 유교식으로 거행하고 민간에서도 주자 가례를 시행할 것을 장려하였다. 문화적으로는 저 유명한 한글을 창제하고 수많은 과학 발명품을 만들어 냈다.
세종대왕의 업적 중에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꼽으라면 한글창제를 뽑을 수 있다. 한글이 창제됨으로써 우리나라 사람들도 우리말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궁중에 정음청을 두고 집현전 학사들을 지도하여 1443년(세종25년) 훈민정음 28자를 연구·창제하고 3년 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연후인 1446년 9월(음력) 에 이를 반포함으로써 민족적 주체성을 통한 우리 민족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한 목적에 대해 “우리 말의 음운 체계가 중국과 달라서 본디 중국어를 기록하도록 마련된 한자로는 통하지 않으므로 하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글로 표현하려고 하여도 끝내 자기 뜻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서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기에 매우 편하게 되기를 바라는 나이다.” 라고 하였다. 세종왕은 글에 어두운 백성들을 위해 우리나라 말을 쉽게 기록할 글자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한글이다. 오늘날 한글은 그 원리나 형태가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며, 익히기 쉽고 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로 평가되고 있다. 한글 창제의 더 큰 의의는 한문을 무조건 숭상하던 많은 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와 백성의 앞날을 위하여 우리의 글을 만들어 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학문 창달을 위해 힘을 썼다. 세종은 글을 많이 읽어 눈에 장애가 올만큼 학문을 사랑하였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부활하여 우수한 젊은 학자들로 하여금 학문을 강론하고 옛 제도를 연구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토록 하였다. 우선 경자자· 갑인자· 병진자 등 개량활자를 만들어 월인천강지곡·용비어천가·농사직설·고려사·삼강행실도·팔도지리지·석보상절·의방유취 등 귀중한 책을 간행하고, 경제육전을 반포하여 농업을 크게 장려하여 전제와 세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과학의 진흥을 위해 힘썼다. 세종대왕은 국민을 위하여 농업을 진흥하려는 데 뜻을 두고 한 평생을 천문, 지리 등 과학기술을 연구 보급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장영실, 이천 등 젊은 과학자들을 격려하여 천문관측기구인 대·소간의, 일성정시의, 혼천의, 시간을 재는 앙부일구(해시계)와 자격루(물시계) 등을 만들었다. 이렇게 시계를 만든 것은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다. 당시까지야 첫 닭이 울면 아침이구나 하고 눈을 떠 일을 나가고 내가 뉘엿뉘엿 지면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 년 농사도 마찬가지여서 자연의 변화에 따라 씨를 뿌리거나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때 까지는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가 중요하였다. 그러나 시계를 만듦으로써 정교하게 하루를 그리고 일 년을 측정할 수 있고 그것은 인간이 시간에게 종속당하는 것이 아닌 시간을 인간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 했다. 또한 측우기를 제작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강우량을 측정하도록 했으며 수표를 만들어 하천의 수위를 재게하고 외국의 역법(曆法)을 참작하여 역서와 천문도를 제작했다. 이리하여 천문·지리 등 과학기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런 과학 기술이 세종 때 비약적으로 발달한 이유는 농사에서 찾을 수 있다. 세종 때 여러 업적을 살펴보면 하나의 맥락 안에서 추진된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민본정치라는 것이다. 건강한 백성들이 농사를 잘 짓게 하기 위해서 정확한 농시를 알려주고자 여러 가지 천문 관측기구를 발명하였고, 한양 기준의 역법 체제를 정비하게 되었다. 또한 농민이 한 해 동안 지은 수확량을 제대로 파악하여 세금을 거두기 위하여 조세 제도를 정비했다. 마지막으로 농사의 풍흉 정도를 국가 차원에서 밝히기 위해 한 해 동안 강수량은 어땠는지 농사짓기에 적합했는지를 측정할 수 있는 측우기를 발명 했다. 이렇게 백성의 근간인 농민을 위하는 세종대왕의 마음에서 계획들이 일관성 있게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대왕은 역대로 신사상과 신기술의 통로였던 중국의 명나라와의 교류정책을 적극 펼치는 한편 바다를 건너와 백성을 괴롭히는 왜구를 응징하여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는 한편 3포를 개항하여 일본과의 선진관계를 도모하였다. 북방으로는 최윤덕으로 하여금 평안도의 야인을 평정케 하여 4군을 설치하고 김종서로 하여금 함경도에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우리나라의 국경을 확정시키는 등 국력을 강하하였다.
조선 초기까지의 음악은 고려시대부터 전해오던 음악과 중국음악이 서로 혼합되어 무질서한 상태였으나 세종대에 이르러 정리하였는데, 이는 아악의 부흥과 향악의 창작이었다. 대왕은 박연 등으로 하여금 각종 악기를 만들게 하였고 특히 편경과 편종을 새로이 제작하였으며, 악곡·악보 등을 종합 정리하여 바로잡아 아악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결론
세종 때는 우리 민족사에서 다시 찾기 힘든 황금기였다. 정치적으로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며 안정이 되었고 우리말인 한글이 창제 되었고, 과학기술과 문화가 찬란하게 발달하였다. 세종대왕의 이러한 업적 중에서도 주목할 점은 인제를 신분의 제한 없이 능력이 있는 사람을 등용하였다는 것이고, 이렇게 등용된 인물의 대표적인 예가 장영실이다. 장영실은 노비 출신으로 세종에 의해 등용되어 많은 과학기술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또 주목할 점은 세종대왕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였다는 것이다. 백성들이 자기 나라의 말을 못 쓰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한글을 창제하였고, 백성들의 농사를 돕기 위해 여러 가지 과학발명품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세종대왕인 만큼 나는 세종대왕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왕이라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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