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초기의 阿彌陀如來像에 대해서는 7세기 중반의 작품이 확인되지만 이 시기의 阿彌陀像은 法隆寺 獻納寶物144호 불상처럼 彌勒如來圖像을 차용한 倚坐像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당시 阿彌陀信仰이 彌勒信仰과 밀접하게 결합했던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7세기 말이 되면 唐代淨土敎의 흐름을 이어가는 阿彌陀信仰을 배경으로 橘夫人念持佛 阿彌陀三尊像을 비롯한 인도식 통견·연화좌 위에서 結跏趺坐를 한 阿彌陀像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도상의 阿彌陀像은 善導流 淨土敎의 수용을 시사하고 있으며, 觀想念佛과 稱名念佛의 대상으로 기능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종교적 기능은 8세기 전반의 東大寺 阿彌陀堂의 淨土集會群像에 계승되는 것과 함께 善導流 의례에 바탕을 둔 阿彌陀悔過가 阿彌陀堂에서 행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7세기 말에서 8세기 중반의 阿彌陀像은 彫像에서 板佛, 塼佛에 이르기까지 대륙...
박준형 ( Park Junhyeong )동양미술사학회, 동양미술사학[2017] 제5권 65~125페이지(총61페이지)
중국 宋代는 북방의 遼, 金의 침입을 받아 내외적으로 어려운 시대였지만,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상업과 수공업 방면에서는 큰 발전을 이룩하였던 시대였다. 특히 陶瓷 생산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각 지역별로 청자 및 백자와 더불어 黑釉瓷器 역시 크게 유행하였다. 필자는 福建省 建窯 窯址의 흑유자기 출토 현황을 조사한 결과 송대에 黑釉碗이 다른 器形에 비해 많이 출토됨과 그 중 변화과정이 가장 뚜렷한 黑釉束口碗에 주목하였다. 이에 본 논고에서는 중국의 흑유자기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宋代의 건요 및 建窯系 요장에서 출토된 흑유완 중에서도 黑釉束口碗을 표본으로 편년이 확실한 각 유적에서 출토된 동일한 기물과 비교하여 그 형태를 분석하였다. 그리고 그 조형적인 특성과 변화과정을 살펴보면서 흑유완의 전개과정과 송대에 유행한 `鬪茶`로 대변되는 茶문화를 서로 연계하...
본고는 산서와 섬서 지역 두 곳의 명대 사원에 있는 서방정토도상에 대해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아미타신앙 및 조상활동이 기층사회에도 여전히 성행하였으며, 새로운 성취 또한 이룩한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태원 영녕사에 있는 명대 아미타불48원도상은 태원현과 태곡현의승속 공양인들이 출자하였으며, 남송 왕일휴가 엮은 『불설대아미타경』을 근거로 하고 있다. 화면은 산수화와 인물화의 기법이 잘 어울려져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이와 같은 종류의 벽화로서는 유일한 유적이다. 다음은 서안 미타선사 명대 천순6년(1462) 비석의 서방극락세계도이다. 화면 대부분은 당대부터 내려오는 서방정토경변의 요소들을 빌려 표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관무량수불경』의 내용에 근거해 구상하였다. 이는 한 폭의 전통적 표현방법과 명대의 정신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낸 서방정토경변굉도이...
이태호 ( Lee Tae-ho )동양미술사학회, 동양미술사학[2017] 제5권 165~179페이지(총15페이지)
<조완 좌상趙??坐像>은 뉴욕 첼시에 있는 미술품보존연구소 Fine Art Conservation Group(소장: 김수연)에서 만난 무신초상화이다(도 1). 이 초상화의 얼굴은 영조 50년(1774년) 1월 15일(음력)에 시행했던 무과과거시험에서 합격한 18명의 반신 초상화첩 《등준시무과도상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실린 을과 2등의 조완 반신과 동일한 인물임이 확인된다(도 2). 18명의 무신상 가운데 당대 전신상으로는 유일본이 발견된 셈이다, 조완은 1724년에 태어나 영조 24년(1748) 정시무과에 급제한 뒤 관료생활을 하였고, 벼슬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두 작품의 초상화법도 동일 화가의 솜씨여서, 새로 발굴한 <조완 좌상>의 제작시기를 영조 50년(1774년)으로 보게 한다. 오사모에 해치 흉배가 ...
이 글은 19세기 극락세계의 모습을 불화로 가시화한 <極樂九品圖>에 대해 조성배경과 특징, 그리고 圖像의 연원을 구명한 글이다. 19세기에는 전체 화면을 가로와 세로로 분할하여 나누고, 극락의 세계과 왕생장면을 그린 독특한 형식의 불화가 출현하여 近畿지역 왕실의 願堂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이러한 불화를 <극락구품도>라고 하는데 이 글에서는 서울 興天寺에 봉안된 <극락구품도>를 통해 불화의 도상과 특징을 살펴보았다.
흥천사는 19세기 후반 고종의 私親이자 실권자였던 興宣大院君 李昰應(1820∼1898)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佛事가 후원되었다. 이하응의 후원에 힘입어 흥천사에서는 전각을 重修하고, 불화를 새롭게 조성하여 전각에 봉안하였으며 왕실의 祈福을 기원하였다. 이하응 이외에도 흥천사에서는 상궁들의 후원으로 불화가 조성되었다. 왕실의 안녕을 빌기 위해 흥...
미륵신앙에는 하생신앙과 상생신앙이 있기 때문에, 미륵은 보살형과 여래형의 두 종류로 조형화되어 왔다. 이 중에서 보살형의 미륵은 지물(수병)이나 수인(접법륜인), 좌세(교각좌, 병각의좌, 반가좌 등)에 의해 쉽게 판단할 수 있지만, 여래형의 미륵불은 간단하지 않다. 당대가 되면 미륵불은 대부분 예외없이 의좌(병각의좌)상으로 표현되지만, 수 이전의 미륵불은 입상, 부좌상, 교각상, 의좌상, 반가좌상, 유희좌상 등 여러 종류의 형식이 있다. 하지만 수인이나 지물에 미륵으로서의 특징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명문에「미륵」이라고 새기지 않는 한 미륵불을 구분하기란 어렵다. 그렇다면 어떠한 경위에서 의좌상이 미륵불 전용의 자세가 된 것일까? 본고에서는 북조시기의 여래형 미륵상을 주제로 삼아, 의좌형식이 미륵불의 전형이 되는 이전의 상황을 명확히 하려고 한다...
敦煌 莫高窟 제57굴은 제220굴(642년) 이후에 주류가 되는 대화면 의 정토변상도가 출현하기 이전, 당 전기 제1기를 대표하는 석굴로 알려져 있다. 본고에서는 제57굴 바깥 감실 정면 좌우의 하부에 그려진 보살좌상에 주목하였다. 북벽의 상은 나무 아래에 양 다리를 모으고 앉았으며, 남벽의 상은 나무 아래에서 등좌 위에 반가사유하는 자세를 취한다. 이 조합, 그리고 이와 유사한 조합을 한 보살좌상은 수 제2기 굴 중에 이미 나타나고 있으며 이 상들은 미륵상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고 알려져 있다. 제57굴의 경우 정벽 본존은 의좌의 자세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미륵여래는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2구의 보살좌상은 이 석굴의 조영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러한 불상을 고찰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미륵정토를 비롯한 정토왕생에...
이 논문에서는 9, 10세기에 만들어진 돈황 막고굴 제231, 237, 72굴 서쪽 벽감 천장에 있는 서상도(瑞像圖)나 장경동에서 가져온 견본화(絹本畵)에 그려진 서상 중에 미륵이라는 제기(題記)가 있는 도상을 다루었다. 특히 이 도상에 대한 선행 연구를 검토하고 수정을 거쳐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을 추가하였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천축백은미륵서상(天竺白銀彌勒瑞像)``에 관해서는 미륵을 백은색(白銀)으로 보는 근거를 고찰하였고, ``미륵수석가현서상(彌勒隨釋迦現瑞像),`` ``건타라국백석미륵서상(健陀羅國白石彌勒瑞像)``에 대해서는 선행 연구의 견해(同定)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또, ``복주철미륵서상(?州鐵彌勒瑞像)``의 경우를 보면, 인도나 우전(于?)의 서상이 대부분인 돈황의 서상도 가운데에 극히 드물게 중국 내지의 서상으로, 문헌 ...
김영미 ( Kim Youngmi )동양미술사학회, 동양미술사학[2016] 제4권 207~240페이지(총34페이지)
고려청자 발생의 직접적인 관련성 때문에 당대 월요청자 비색자인 옥벽저완(yubidiwan)은 학계의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옥환저완(yuhuandiwan)을 비롯한 오대부터 북송시대 월요청자의 유입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본고에서는 먼저 중국 각 지역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월요청자의 현황과 유통경로를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한반도에서는 오대·송 시기의 최상급 월요청자는 후삼국시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와 후백제 지역, 그리고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 주변의 유적 및 왕릉, 그리고 사찰 및 생활유적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최상류층에서 유행했던 월요청자의 소비패턴의 흐름을 통해 확인된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옥환저완, 대접, 발, 항아리, 잔, 잔탁, 주자, 타호 등의 수준은 오대·송 집권층과 요 정권에 공납되...
김영원 ( Young-won Kim )동양미술사학회, 동양미술사학[2015] 제3권 5~47페이지(총43페이지)
司饔院의 分院 官窯는 조선 도자기 역사의 연구에서 가장 핵심적이 고도 근원적인 연구 주제이다. 분원 관요를 준거로 하여 시기구분을 비롯한 도자 양식 연구 및 官職연구, 관요의 명칭 문제 등 여러 세부 주제를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조선 왕실의 정책의 단면을 파악하고 문화와 생활 등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분원 관요의 연구가 필수적이다. 주지하듯이 분원 관요는 朝鮮 前期에 京畿道 廣州일대에 설치되어 조선 말 민영화되기까지 조선 왕실과 궁궐 및 관청에 도자기를 납품한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따라서 국가의 정책이 곧 관요의 도자기 제작과 양식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관요를 중심으로 왕실 및 궁궐자기가 대량생산되었고, 관요 백자 양식이 탄생했으며, 도자기 제작 판도에도 변화가 일어 분청사기가 쇠퇴하고 백자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