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편

 1  역사스페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편-1
 2  역사스페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편-2
 3  역사스페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편-3
 4  역사스페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편-4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역사스페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사회자: 여러분은 철학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철학의 철자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누구나 한번씩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들어봤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 보시는 그림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입니다. 이 그림에는 오늘 여러분에 소개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와 있습니다. 여기 좀더 그림을 확대해보지요.
여기 자신의 철학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타이모스를 들고 손을 위로 한사람은 플라톤입니다. 역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들고 손을 아래로 가르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르키고 있을까요?
오늘 이시간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서 그들이 손의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그들을 만나기 전에 그들에 대한 소개를 해야겠군요. 먼저 플라톤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플라톤 소개
플라톤의 개인적배경과 시대적배경
약 기원전427년 플라톤은 약 4세기 동안 그리스 세계의 문화의 중심지였던 곳에 살고 있는 부유한 가정이고 귀족적인 아테네 가문에서 태어났다. 부친과 조부의 세대들이 반 세기에 걸쳐 살았고, 그 기간 동안 아테네는 가장 큰 힘이 있었고 장엄했으며 그리고 그의 가족은 그들의 도시의 정치적인 생활에 깊이 관여했다.
플라톤이 20세 때 소크라테스의 문하에 들어갔다고만 전해지고 있다. 아마도 소크라테스를 통하여 그의 사상이 형성이 시작되었고, 그의 사색과 탐구의 생활에서 불멸의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399년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하기까지 8~9년 간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웠다. 소크라테스는 399년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해 공개적 탐구행위를 중지하라는 아테네의 지도자들의 명령을 거부함으로서 우둔한 시민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죽음은 분명히 사법적 살인이었다. 이 행위가 젊은 철학도 플라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플라톤은 한 시기의 말에 태어났다. 그가 출생하기 4년 전에 Pericles는 스파르타와 비참한 전쟁에 아테네를 끌어넣었다. 그 전쟁은 거의 30년을 지속했고 결국에는 아테네의 완전한 굴복으로 끝나버렸다. Peloponnesos 전쟁이 있던 해 무서운 전염병이 Attica를 엄습했고 다음 4년 동안 전 인구의 1/3까지를 전멸시켰다. Pericles는 429년 사망했고 국가에 정치적 안정과 군사적 지배권의 살아있는 상징을 부여하지 않았으며 더욱 더 불안한 지도력 아래에서 스파르타의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도전에 대처하기 위하여 국가를 방치했다. 플라톤의 유년기, 청년기와 성년 초기의 생활은 전쟁 중에 있는 국가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의 가까운 친척들의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관심들은 정치와 군사적인 전쟁에 관한 논쟁점이 그의 생가에서의 깊은 관심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플라톤은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지고,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 인하여 민주제에 불만을 갖게 된다. 민주사회란 우매한 다수가 지배하는 세상, 숫자로 밀어 횡포 부리는 세상으로 생각하고 차라리 한 사람의 철학적 군주, 지혜로운 통치자가 다스리는 나라야 말로 이상국가라 주자하며 철인정치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위기와 갈등을 목격한 플라톤은 적어도 세 가지의 인생의 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세 길이란 시인, 정치가, 철학자의 길을 의미한다. 확실히 그의 대화편을 읽을 때 그의 천부적인 시인의 자질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은 시인의 길을 갔더라면 위대한 시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포기하고 아테네의 정치사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톤은 정치가가 되려는 야망을 노년까지 가지고 있었다. 40세 때 플라톤은 정치적 목적 때문에 이태리와 시실리를 방문하였다. 이때 시라큐스에서 그는 참주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세를 만났고, 그의 사위인 20세의 디온(Dion) 을 만났다. 디온은 곧 열렬한 플라톤 숭배자가 되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플라톤이 74세 이었을 때 디온이 살해당하자 그의 정치적 꿈은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 그는 좌절 속에서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플라톤의 정치적 야망의 좌절과 당시의 상황에서 경험한 고뇌는 역설적으로 인류에게 영원한 사상을 남겨주는 계기가 되었다. 플라톤이 정치가로서 성공했다면 아카데미의 설립은 물론이고 그의 불후의 저작들이 쓰여 졌을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388-7년 플라톤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아카데미를 창설하였다. 아카데미의 창설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소크라테스의 사명을 계승, 발전시키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창설했을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 자신의 정치적 이상에 대한 좌절이 교육과 철학에 전념했을 지도 모른다. 청년을 지혜롭게 하고자 하는 의도와 더불어 탁월한 입법자의 출현이 플라톤에게는 최대의 관심사였다. 플라톤은 아카데미에서 탐구와 교수를 하면서 그의 만년의 생활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