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건국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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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조선 건국 보고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군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연하게 되었다. 이들 중에서 세력이 강한 군장은 주변의 여러 사회를 통합하고 점차 권력을 강화하여 갔다.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 이었다. 고조선은 단군왕검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한다(B.C.2333). 단군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 (단군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응제시주,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고 있다. 천신의 아들이 내려와 건국하였다는 단군의 기록은 우리 나라 건국 과정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홍익인가의 이념을 밝혀 주고 있다. 이것은 또 고려, 조선, 근대를 거치면서 나라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마다 우리민족의 전통과 문화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왔다.)
2. 고조선의 위치
고조선의 위치 문제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로부터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 왔다. 그 중 대표적인 견해가 대동강 중심설, 요동 중심설, 중심지 이동설이다. 대동강 중심설은 고조선의 중심을 대동강 유역으로 보는 것으로 중국학자들과 우리나라 전통 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다. 요동 중심설은 오늘날 북한학계의 공식적인 입장으로서 실학자들과 신채호, 정인보등과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견해를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북한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단군릉의 발견으로 중심지의 문제가 새로이 정리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중심지 이동설은 앞의 두 의견을 절충한 것이다. 즉, 고조선이 초기 단계에 요동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다가 후기에 대동강 유역의 평양지역으로 중심지를 이동하였다는 입장이다. 이 의견이 현재 남한 학계의 주된 경향이다. 이와 같이 여러 의견을 종합해 보건대, 고조선은 대동강과 요하 유역일대에서 세력을 떨쳤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인 비파형동검과 미송리식 토기가 출토 되는 지역으로 알 수 있다.
3. 고조선의 사회 경제 문화
고조선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것으로 8조의 법이 있다. 그중에서 3개 조목의 내용만이 전해지는 데, 그것은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며, 상처를 입힌 자는 곡물로써 배상하게 하고,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당시 사회에서는 생명과 사유재산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이것은 당시 사회에 권력과 강제력에 차이가 생겨나고 재산의 사유가 이루어지면서 형벌과 노비도 발생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죄를 짓는 것을 수치로 여겨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아 문을 걸어 둘 필요가 없었다고 하며, 여자는 정절을 귀중하게 여겼다고 하는 데에서 가부장제적인 가족 제도가 확립 되었음도 알 수 있다.
* 또한 고조선 사회의 성격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예로서 강상 무덤을 들 수 있다. 이 무덤은 돌을 쌓아 무덤의 구역을 정하였으며 그 안에 무려 23개의 무덤 구덩이가 있고 그 구덩이마다 여러 유골들이 묻혀 있다. 따라서 이 무덤을 주인이 죽은 후 가족과 노예들을 같이 묻어 순장한 무덤이라고 생각하고 고조선이 노예제 사회였다는 의견이 있어왔다. 그러나 유골 조사 결과 그들이 죽은 시기가 다르다는 것이 밝혀져 이 무덤은 순장 무덤이라기보다는 같은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이 묻힌 무덤으로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울 것 같다. 이와 같은 성격의 집단 무덤으로는 누상무덤, 집촌리 형 고인돌 등이 있다.
* 고조선 사회에서 청동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지만 아직까지 주된 농기구와 생활용품은 석기였다. 대신 청동으로는 도끼, 끌, 송곳 등의 작은 공구류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고조선 후기에 이르러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자 비로소 철제 농기구가 나타나지만 이때에도 주된 재료는 돌과 나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이러한 도구를 가지고 고조선인들은 벼, 기장, 수수, 콩 등을 재배하였다. 그리고 농사에서 중요한 일기를 알기 위해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평안남도 용덕리 고인돌에 그려진 그림을 별자리라고 보기도 한다. 생활에서는 온돌 난방이 시작되었고 음식을 쪄먹을 수 있는 시루도 사용되었다. 베틀을 이용해 옷감을 짰는데 이미 비단과 같은 고급품도 만들고 있었다.
* 이상과 같이 다양한 농기구를 이용해 농업 생산력이 향상 되었으며 인구도 많이 증가하였다. 인구의 증가와 잉여 생산물의 축적으로 교역이 활발해졌으며 그 결과로 사적 소유가 확대되어 빈부의 차이가 커졌다. 또 청동제 무기를 이용하여 정복전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전쟁에서 이기는 쪽은 더욱 재산을 축적하고 그 재산을 축적하는 방법으로 노예를 부리게 되었다.
4. 고조선의 대외관계
고조선이 한반도와 만주를 차지하고 있었던 시기는 중국의 요,순의 시대로부터 서주,춘추,전국, 진,서한 초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고조선은 기원전 2209년 중국의 제순 시대에 중국을 방문하였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중국과 교류하며 발전하였다.
* 그러나 춘추 시대에 들어와 중국이 혼란스러워 지면서 양국간의 사신왕래가 중단되었다. 전국시대에 연나라가 영토 확장 야욕으로 고조선을 침략한 이후로 고조선과 중국과의 관계는 약화되었다. 그러나 한대에 위만 조선은 활발한 중계무역 활동을 통해 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참고문헌
*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 2.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국사. 교육인적자원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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