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대왕의 법 의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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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조대왕의 법 의정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Ⅰ. 시작하기 전에
세종시대는 민족의 역사상 빛나는 시대였음은 누구나 인하는 바일 것이다. 그 시대의 업적을 세세하게 열거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정치, 사회, 경제, 제도의 정비는 물론이고 의학 과학 예술문화 등에도 빛나는 발전을 이루었음은 분명하다. 세종대왕은 특히 애민사상과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휴머니즘적 인간애, 실용적이고 실리적인 실무행정능력, 독창적 발상과 뛰어난 과학적 사고를 겸비한 지성인이며 지도자였다. 이러한 눈부신 세종시대는 우리민족의 영광이자 행운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나 그러한 눈부신 발전과 업적은 정치적 안정기반 위에 그를 보필한 훌륭한 신하와 학자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으며 이들의 보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사람됨이 그 바탕f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유교와 유교정치에 매한 소양,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문화에 경도되지 않은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하는 신념과 고집, 노비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던 인정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 많은 업적 중 법에 대한 정비라 해서 위에서 열거한 세종의 업적이나 인품을 벗어나 상관없이 따로 생성되었으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함께 맞물려 성장하고 발전된 시대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법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그 많은 세종시대에 세종대왕과 더불어 그의 조력자들이 남긴 업적 중 에서도 그 시대의 법의 정비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조명해 보려한다.
Ⅱ. 바탕이 된 이념과 정치체제
우선 세종대의 법의 정비를 알려면 그 시대상과 밑바탕이 된 이념이 어떻게 법에 반영될 수 있었는가에 대해먼저 알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건국 배경을 우선 보면, 고려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한 후, 권문세족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고, 이러한 상황에서, 사대부 층은 점차 고려 왕조 테두리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려는 온건파와 왕조 자체를 바꾸려는 적극적인 혁명파로 양분되었다. 이때, 다수의 사대부들은 대체로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는 온건파였다. 그러나 정도전 등의 혁명파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권문세족과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파 사대부를 제거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를 개창하였다(1392).
새 왕조는 국호를 조선으로 고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고려 왕조의 구질서를 일신하려 하였다. 중앙 집권적으로 제도를 개혁하여 농민에 대한 지방 토호들의 횡포를 제거하였으며, 과거 제도를 정비하여 관료 체제의 기반을 갖추었다.
조선 건국의 주축이 된 신진사대부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들로 학문적 실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다. 성리학은 유학의 한 유파로 남송 대에 주희(朱熹)에 이하여 완성되었다. 그것이 고려후기에 우리나라에 전파되면서 불교위주의 국가 이념을 대체하게 되었다.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 계층의 학자들은 성리학을 새로운 시대 이념으로 수용하여 여러 가지 말기적인 병폐를 안고 있었던 불교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유교적 도덕정치의 원리와 합리적인 법치주의에 입각하여 국가를 운영하고자 하였는데, 그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이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의 불교 비판론과 유교정치론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념이 되었고 그가 구상한 국가체제는 이후 500여년을 지속한 조선왕조 통치의 기초가 되었다. 여기서 유학에 대한 잠시 설명을 하자면 유학은 사람은 비가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것처럼 법칙대로 행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질서(즉, 체제)와 신분이 이미 내재되어 있어서 정치적 체제가 이미 지배신분의 것으로 확정되어져 있는 것을 말한다. 즉 백성을 통치한다는 이념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수기치인(修身齊家 治國平天下 修己治人) 이라는 문장이 있는데 이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가 있다.
조선시대의 통치이념은 일반적으로 말하길 조선시대의 통치이념을 3가지로 말하는데 조선의 외교정책인 사대교린 정책을 말하고 다음으로 농본 정책을 말하고, 마지막이 숭유정책을 말한다.
조선의 사대교린 정책은 명과는 친교 관계를 유지하고 일본과 여진에 대해서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사용하여 정치적 안정과 나라의 평화 유지에 힘쓴다는 것이다. 명에 대해서는 그들의 명분을 살려 주면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실리를 취하는 외교 활동을 폈고, 왜구에 대해서는 그들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는 한편, 회유책으로 3포를 개항해 주었다. 여진족에 대해서는 압록강 밖으로 쫓는 한편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생필품을 공급해 주었다. 이런 외교정책은 실리를 위한 외교로 실리외교이다. 현실적인 사대외교를 통해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대명정책을 폈다고 할 수 있다.
농본 정책은 조선이 농업을 국가 경제의 기본으로 삼고 농업 생산력 증대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농민의 지위가 전대에 비하여 향상되었으며 경제력도 나아지게 되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유학자체가 농본주의이기 때문에 조선도 농본 정책을 펴게 된 것이다.
숭유정책은 흔히 숭유억불 정책으로 많이 사용되는데, 실제 조선은 ‘외유내불’의 형태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대부들이 국가 운영 적 측면에서 불교를 비판하였지만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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