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유가 - 맹자, 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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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유가 - 맹자, 순자
맹자 (孟子 ; BC 372?~BC 289?)
맹자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중국 전국시대의 유생(儒生)인 맹가(孟軻), 또는 그의 사상을 전하는 책 이름. 추(芻)나라,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출생. 이름은 가(軻),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라고 하는데 확실하지 않다.
맹자는 BC 4세기 전반에 태어났으며 가난한 사(士)계급 집안에서 편모의 손에서 자란 것 같다. 어릴 때 이야기로 맹모삼천(孟母三遷)이나 단기지계(斷機之戒)의 가르침이 있다. 맹모삼천지교(三遷之敎), 단기훈계(斷機訓戒)의 보람이 있어 맹자는 어린 시절을 올바르게 자라났을 것으로 여겨진다. 젊었을 때 노 (魯)나라로 유학하여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孔伋)의 문하생에게 배웠다. 뒤에 제자들을 이끌고, 이라는 대부대를 이루어 양(梁;魏)나라 혜왕(惠王), 제(齊)나라 선왕(宣王), 추(鄒)나라 목공(穆公), 등나라 문공(文公) 등에게 유세하고 돌아다녔으나, 만년에는 향리에서 후진들을 지도했다.
맹자의 생졸년월에 관한 고증은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시도 되었으나 극히 번거롭고 일치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맹자의 향년은 대략 74세, 84세, 94세,97세 네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일반적으로 84세(BC 372~289) 설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생년은 周 열왕 4년 (BC 372) 설이 비교적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 본래 맹자의 생졸연대는 사전(史傳)에 기록이 없으며, 후세에 여러 가지 이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맹자의 사상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에는, 유력한 제후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무력으로 타국을 귀속시켜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들의 목표는 춘추시대의 제(齊)나라 환공(桓公)이나 (晉)나라 문공(文公)과 같은 패자(覇者)가 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맹자는 그의 이상주의적인 사상을 제후에게 유세하고 다니면서 패도(覇道)를 부정하고 왕도(王道)를 제창했다. 힘으로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패도로는 인심을 장악할 수 없으며, 인애(仁愛)에 의한 왕도로써만 민심을 얻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 하였다. 군대나 영토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민심의 장악이야말로 통치의 요체(要諦)라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었다. 이 왕도론은 이상주의적인 사상이어서 결국 사용되지 못했다. 맹자의 민심파악 중시사상은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의 긍정이라는 과격한 형태로도 나타났다. 또 왕도정치의 일환으로서 그가 제창한 정전법(井田法)도 유명하다. 정전법이란 전답을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중앙을 조세용 공전으로 하고, 그 주위를 균등하게 배분한다는 것인데, 토지제도 이념으로서 그 뒤에 오래도록 사용되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인(仁)·의(義)·예(禮)·지(智)라는 사덕 (四德)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사단(四端) 즉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 등의 마음씨로 나타난다. 사람은 이 사단을 확대하여 마음의 선성(善性)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유명한 성선설(性善說)이다. 그의 이 주장은 약 50년 후배인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과 아울러 오랫동안 인성설의 두 전형(典型)이 되었다. 맹자 시대는 유세가(遊說家)가 활약했던 시대였다. 특히 제(齊)나라의 도읍 임치에는 유세가가 많이 모여, 그 활황을 이라 했다. 맹자도 이 직하(임치)에서 논진(論陣)을 편 일이 있었으나, 다른 지방에서도 활발하게 논쟁을 했다. 맹자가 가졌던 일련의 논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성(性)에 대한 선악을 말할 수 없다는 고자(告子)와의 응수이다. 또 차별 없는 사랑을 주장한 묵적(墨翟; 墨子)의 겸애설(兼愛說), 철저한 이기주의를 주장한 양주(楊朱)의 위아설(爲我說)을 모두 극론(極論)이라 하여 물리치고, 가족윤리를 기둥으로 차츰 남에게 파급시키는 인의(仁義)를 주장했다.
- 성선설과 왕도정치
맹자의 사상은 인의설(仁義說)과 그 기초가 되는 성선설(性善說), 그리고 이에 입각한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으로 나누어진다. 공자의 인(仁)의 사상은 육친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친애(親愛)의 정을 널리 사회에 미치게 하려는 것이며, 이 경우, 소원한 쪽보다 친근한 쪽으로 정이 더 간다는 것은 당연시되었다. 가족제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인 것이다. 맹자는 이를 받아들여,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인애(仁愛)의 덕(德)을 주장하고, 한편으로는 그 인애의 실천에 있어서 현실적 차별상(差別相)에 따라 그에 적합한 태도를 결정하는 의(義)의 덕을 주창하였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로서, 의는 인의 실천에서 준거할 덕이며, 유교사상은 이로부터 도덕사상으로서의 준엄성을 가지게 되었다. 성선설은 그러한 인심(仁心)이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음을 강조한 설이다. 인간의 본성으로서는 악(惡)에 이르는 욕망도 사실은 존재하지만, 맹자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도덕적 요청으로서 본성이 선(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도덕에 대한 의욕을 조장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으로서의 수양은 ‘욕심을 적게’ 하여 본래의 그 선성(善性)을 길러내는 일이었다.
맹자의 성선설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맹자의 철학사상은 공자의 가르침을 확충해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인간의 기본적인 덕목으로 인(仁)을 가르쳤고 맹자는 성선설을 사상체계의 핵심으로 삼았다. 맹자에게 자명한 진실은 사단(四端 : 4개의 마음씨, 즉 惻隱之心·羞惡之心·辭讓之心·是非之心)을 인간이 타고 났다는 점이다. 이 사단을 잘 발달시키면 4개의 최고의 덕인 인(仁)·의(義)·예(禮)·지(智)가 된다는 것이다. 맹자가 주창한 성선설은 수천 년 동안 중국 사상가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다. 맹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직관적 지식과 직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고 개인의 덕성함양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최대한으로 수양한 사람은 자신의 성품을 안다. 자신의 성품을 안다는 것은 하늘을 아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맹자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고대의 전설적인 성군인 요 순(堯舜)과 같은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맹자의 왕도정치는 그러한 인심에 입각한 정치이다. 군주는 민중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한 다음 도덕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인(不仁)한 군주는 쫓아내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당시의 제후가 맹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즉, 맹자에 의하면 통치자는 2가지 측면에서 백성의 복지를 보살펴야 된다고 한다. 즉 백성들의 생계를 보장하는 물질적인 상황을 만들어 주어야 하고 그들을 교육시키는 도덕적·교육적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그는 백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보장해주는 구체적 계획에 대해 언급했고 이 이야기가 〈맹자〉에서 3번이나 나온다. 또한 조세경감, 자유무역, 천연자원의 보존, 노약자를 위한 복지대책 수립, 보다 공정한 부의 분배 등을 주장했다. "생계수단이 든든할 때라야 든든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다"(恒有産 恒有心)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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