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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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쟁
1.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
기대승은 정치가로서보다는 학자로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퇴계와의 사이에 벌어진 ‘사단칠정논쟁은 조선후기의 성리학을 주리파로 주기파로 나누는 연원이 되었고, 또 율곡과 우계와의 논쟁도 이에서 발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논쟁의 당사자였던 퇴계와 고봉은 서로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대하였으며 서로가 묻고 배우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퇴계가 고봉보다 26년이나 연상이었지만 퇴계는 그를 제자로서보다는 학우로 대하였으며, 고봉은 퇴계를 스승으로 대하였다고 한다. 삼십대 초반의 청년 기대승은 오랫동안 명성을 들어왔고 또 서신으로 학문적 논쟁을 벌였던 퇴계를 직접 만나보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퇴계가 학자의 길을 걷기 위해 안동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는 광나루까지 퇴계를 전송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한강은 도도히 쉼 없이 흐르는데 선생의 가심을 어찌 말리랴
모랫가 머뭇거리며 돛 당기는 곳에서 이별의 슬픔 헤아릴 수도 없네."
앞에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기대승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치의 이상에 충실하려는 사림의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는 사람과는 그가 누구이든 간에 배척해 마지않았다. 공의전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에는 심지어 퇴계의 판단까지도 뒤집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조정에서 빈번한 마찰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그는 사직과 귀향을 되풀이해야 했다.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을 적에도 고봉은 그 직을 사하고 귀향하여 ‘낙암(樂庵)이라는 거재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면서 학문에만 종사하고자 한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른바 변무주청사의 일로 소명을 내렸던 까닭에, 기대승은 하는 수 없이 나가 수 개월 동안 대사간 자리에 있다가 곧 사퇴하고 귀향을 서둘렀다. 그러나 불행히도 도중에서 얻은 병으로 그는 귀향조차 다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게 되니 그의 나이 겨우 마흔 다섯이었다. 그는 죽음에 임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명이 길고 짧은 것,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어려서부터 글 읽기에 힘썼고 드디어 성현의 학문에 뜻을 모았다. 중년 이래도 겨우 얻은 바 있으나 공부가 독실하지 못하여 항상 마음먹음 바에 부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만일 임하(林下)에서 몇 년 만 더 학문을 강구할 수 있었다면 다행이었을 텐데, 병이 들었으니 이를 어찌할꼬?"
2. 고봉 기대승의 사상
고봉이 학문함과 관련하여 가장 중시했던 것은, 과거시험이 학문의 첫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먼저 실용의 학문과 성격의 학문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효제의 절의가 학문의 주류를 이루어야 하고, 진실무망(眞實无妄)의 성과 주일무적의 경이 중심을 이루는 공부를 하여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하며 살았다.
# 사단칠정논변 : 사단칠정논변은 조선조의 성리학계의 학술적 수준을 한 차원 도약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학술 논변이다. 사단칠정논변 이후로 조선조의 지식인으로서 이 논제에 대하여 자기 견해를 세우지 못하고 있으면 선비로서 대우 받기 어려웠을 정도로 이 논제는 퇴계고봉의 논변 이후 조선조 내내 논란이 되어 온 성리학상의 커다란 논제이다.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 칠정론이란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해석하면서 생긴 논변이다. 이 논쟁은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어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고 한 것을 이황이 “사단은 리의 드러남(發)이요, 칠정은 기의 드러남”이라 고친 것에 대하여 기대승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시작된다.
(1) 사단과 칠정의 의미
사단(四端; 네 실마리)은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네 실마리는 인간의 본성의 선함[미발의 理]을 설명하려고 든 것이다. 맹자는 우물에 빠지려는 순간의 어린애를 보는 것을 예로 들면서, 그 때 깜짝 놀라 “측은히 여기며 구해 주려는 마음"은 인간이 본래 타고난 사랑하는 마음 [미발의 仁]이 실마리로서 드러난 것이라고 한다. 나아가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실마리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실마리이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혜의 실마리라고 한다.
칠정은 『예기 樂記』에 나오는 말로 `喜怒哀樂愛惡欲을 말한다. 이것은 『중용』에 의하여 중요한 철학적인 개념으로 등장한다. “희로애락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중용(中)이라 하고, 드러나서 다 법도에 맞는 것을 조화로움(和)이라 한다” 여기에서 (마음이 아직)‘드러나지 않은 것(未發)’은 ‘형이상자’에 대응되는 것으로 우리에게 본래 주어진 마음[性]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미 ‘드러난 것(已發)’은 형이하의 현상 세계에 대응하는 우리의 의식을 가리키며, 이 의식(혹은 감성; 情)이 법도에 맞게 나타나면 조화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이의 「顔子所好何學論」에서 좀더 명백해진다. “사람의 마음의 근본(性)은 참되고 고요한 것으로 미발인데 다섯 본성(仁義禮智信)이 갖추어져 있다. 이에 몸이 생기면 바깥의 사물이 이 몸에 접촉하여 가운데(性)가 움직인다. 이 움직임에서 일곱 감정이 나온다. 이 감정의 움직임이 치열하고 방탕해지면 그 본성이 은폐된다” 이러한 것을 그는 물에 비유한다. 미발의 본성은 밝은 거울과 같은 고요히 있는 물이다. 이 물이 흘러가면서 부딪치고 튀며 요동하는 것이 감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