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시가] 쌍화점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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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전시가] 쌍화점 분석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쌍화점의 시대적 배경
2. 쌍화점의 가사의 해석
3. 각 연의 분석
4. 종합 의견
- 타락의 순서
- 쌍화점이 궁중에서 불리어 질 수 있던 까닭?
- 반복되는 형식이 주는 효과
- 후렴구에 대한 생각
- 화자의 위치가 어디인가?
- 삿기 광대, 삿기 상좌, 두레박, 시궁 바가지는
각각 어떤 역할을 하는가?
- ‘그 잔 곳 같이 울창한 곳이 없다’에 대한 3가지 해석
- ‘갑녀, 을녀’의 비교
- 기타 시구에 대한 의견
5. 결론
본문내용
쌍화점은 고려 충렬왕 때 지어진 노래로 ≪악장가사≫에 실려 있다. 또한 ≪고려사≫악지(樂志)에는 제 2 장만이 발췌되어 '삼장(三臧)'이라는 제목으로 한역되어 전한다. 조선조에는 이른바 男女相悅之詞의 대표적인 노래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충렬왕 시대의 시대상황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260년(원종 1) 태자에 책봉되고 1274년 5월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여 원종이 죽자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른다. 대륙국가와의 왕실혼인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로써 고려는 역사의 한 전환기를 맞게 되어 양국의 우호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었고 역대 권신들의 발호에 억눌려오던 왕실의 지위도 회복, 강화할 수 있었으나 자주성을 잃은 종속국으로 전락하여 이후 원나라의 많은 간섭을 받게 되었다. 결혼한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와서 몽고양식의 생활을 하고 사사로이 부리는 사람도 원나라에서 데려옴으로써 고려왕실에는 몽고의 풍속·언어 등이 퍼지게 되었다. 그 뒤 원나라의 내정간섭과 왕 자신이 세자나 공주가 말릴 정도로 사냥을 좋아하여 국고를 고갈시켰고 1298년 정치에 염증을 느껴 왕위에서 물러났으나 충선왕이 왕비 계국대장공주의 무고로 국인(國印)을 빼앗기고 원나라로 가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사냥과 음주가무에만 몰두하였고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귀국하자 실권을 빼앗기고 왕위에서 물러나 1308에 죽으니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능은 경릉(慶陵:開城 소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