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 그 끝없는 시지프스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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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 그 끝없는 시지프스의 굴레
1800년대 자유무역경제는 결국 자본주의 국가들간의 식민지 경쟁을 불러왔다. 그리고 그것은 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켰다. 전쟁 후 제국주의 전승국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영토를 재분할하고 패전국에 대해 막대한 배상금과 군비제한 등으로 철저히 응징하였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쟁 물자 공급 등으로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 되었으며, 전쟁 후에도 피폐해진 유럽에 농산물과 공업제품 등을 수출함으로써 급성장했다. 미국의 경제성장으로 기업이 흑자를 내고 주가가 오르자 사람들은 주식으로 큰돈을 벌기 위해 주식시장으로 몰려들었다. 1929년에 취임한 후버 대통령조차 미국 경제의 영원한 번영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전후 피폐했던 유럽의 생산력이 점점 회복되자 수출은 줄어들었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시장이 축소되어 생산과잉 상태가 됐다. 거기에 소비에트가 사회주의를 선언하며 국제시장을 탈퇴해 큰 타격이 됐다. 마침내 1929년 10월24일, "암흑의 목요일" 월가의 주식이 폭락했다. 이것은 세계경제공황의 시작이었다. 주가는 한 달 사이에 40%나 폭락했고 이후 3년간 계속 하락했다. 이로써 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속출해 소비가 위축되는 불황의 악순환이 시작됐다. 후버는 경제를 구하는데 실패했다.
1933년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뉴딜정책을 추진했다. 케인즈는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여 공기업을 육성하고 국민의 일자리를 창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이전의 고전경제학이 주장해온 자유경제와는 다른 것이었다. 고전경제학의 주장은 정부의 인위적인 시장개입은 시장의 가격 메커니즘을 왜곡시켜 최고 효율의 자원 분배를 저해한다는 논리였다. 따라서 공급만 해주면 수요는 알아서 따라 온다는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생산의 무정부성은 언제나 과잉생산 과잉공급을 초래할 위험성을 그 자체에 내포하고 있다. 1929년 공황은 그 결과였다. 케인즈는 ‘수요가 있으면 가격이 상승’하고 그러면 기업은 공급량을 늘리게 되어 경제가 균형을 찾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수요를 늘리기 위해서는 가계의 소득을 증대시켜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케인즈주의의 핵심은 국가가 국민경제에 개입해서 시장의 문제점을 보완한다는 것이었다. 국가는 물가와 실업 등을 조정하는데 집중하고, 복지제도의 강화를 통해서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시키자는 것이었다. 케인즈주의는 자본가들의 요구와 노동자들의 요구를 절충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국가는 기업 활동에 개입하지 않고, 국가의 개입은 화폐정책과 재정정책 등 거시경제에 초점을 맞추고, 주식시장 등의 금융활동의 통제, 완전고용, 교육 및 연구지원 확대 등이 그것이었다. 이는 당시 테일러, 포드주의 영향으로 마구 쏟아져 나오는 상품을 소화해줄 소비자가 필요했던 자본가의 요구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본가는 노동자들에게 적정한 임금을 주고, 국가는 실업자 등에게 일정한 지원을 해줌으로써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케인즈주의를 바탕으로 미국 자본주의는 1929년 공황을 딛고 이후 성장하게 되었다.
한편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제국주의 경제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관세를 인상하는 블록경제화를 추진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해 식민지를 잃은 독일과 이탈리아는 군사력을 증강해 새로운 식민지를 획득하고자 했다. 결국 국제 분쟁이 생기고 파시즘이 등장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2차 대전이 끝나기도 전인 1944년, 미국은 전후 세계경제질서를 복구하기 위해 서유럽 전승국들과 함께 브레튼우즈에 모였다. 브레튼우즈 회의의 핵심은 세계통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즉, 세계무역에서의 기준 화폐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통 브레튼우즈 체제라고 한다. 결국 미국의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체제가 성립했다. 또 다른 나라의 돈을 달러를 바꿀 때 교환비율을 고정환율제로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런 역할을 보조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이 만들어졌다. 즉, 무역수지의 불안으로 달러를 구하지 못하는 나라를 위해 달러를 빌려주는 기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세계적인 경제주도권 확립을 의미했다.
전후 유럽의 불안정은 노동계급과 사회주의운동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이를 우려한 미국은 전후 유럽을 지원하는 마샬프랜을 실시했다. 이것은 미국식 자본주의로 유럽을 재편하여 자본주의를 강화하고 미국의 주도권을 확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미국이 남한을 지원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1948년 중국혁명의 성공은 동아시아의 사회주의화의 위험을 강화시켰다. 따라서 미국은 패배한 일본의 재건을 지원하고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의 자본주의를 강화하고자 했다. 한국전쟁을 통해 패전국 일본의 자본주의 체제는 복구되고 강화되었다.
이와 같이 케인즈주의는 1929년 이후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미국을 안정시키는 커다란 역할을 했다. 케인즈주의는 결국 미국의 자본주의를 성장시키고, 이를 통해 세계적 독점자본을 성장시켰다. 이는 또한 소련과의 막대한 군비경쟁의 토대가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미국은 세계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질서를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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