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교육]해방이후의교육사의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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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945년 일본은 세계 2차 대전의 패전국이 되었고, 동시에 우리는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궈 낸 광복이 아니기에, 우리는 광복 후에도 일제와의 악연을 완전히 뿌리 뽑지 못했다. 반민특위는 흐지부지 해산되었으며, 친일 인사들은 미군정의 훌륭한 파트너가 되었다. 심지어 일본군 소위 다까끼 마사오는 쿠테타를 시도하여, 18년 동안 한반도를 통치하였다. 보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했던가? 다까끼 마사오의 후예들은 그 후에도 다시 한번 한반도를 총칼로 유린하게 된다.
1945년 8월 이후 대한민국(가칭)의 헤게모니를 잡은 것은 바로 미국이다. 그들은 광복과 동시에 군정을 실시했고, 또 남북의 분할 상태를 이끌어 내었고, 고착화 시켰다. 이것이 미군정의 시작이다. (미 군정기 :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삼팔선(한반도 북위 38°선) 이남 지역에 미군이 진주하여 하지(J. R. Hodge) 중장의 지휘 하에 1945년 9월 7일부터 1948년 8월15일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약 3년 동안 실시한 군사 통치 시기.)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J. R. Hodge) 중장은 군정장관에 아놀드(A. R. Arnold) 소장을 임명하여 군정청의 체제를 갖추고, 109명의 장교를 각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하였고 교육담당관에는 락카드(E. L. Lockard) 대위 임명했다. 남한에서 정식으로 군정을 실시하게 된 미군은 전투부대로서 정치와 행정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었으며, 한국에 대한 사전 지식도 매우 빈약했다. 미군들은 ‘점령군’의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였으며, 미군정 담당자들은 구 총독부의 통치기구 및 일본인 행정관을 그대로 유임시켜 이용했다.
한국전쟁은 그들의 이미지 메이킹에 엄청난 호재가 되었으며, 군정 이후에는 이승만의 자유당과 박정희의 공화당 등과 밀월관계를 유지하였다. 일례로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사건 당시, 검찰은 김재규가 미국의 명령으로 박정희를 죽인 것인지를 확인하지 못해, 보름 가까이 수사를 진행시키지 않은 적도 있다.
본문내용
60년 이후, 우리는 엄청난-소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우는- 경제적 성장을 일궈낸다. 전국에 걸쳐 공장이 세워지고, 회사가 들어섰다. 나중에 재벌이라고 불리우게 되는, 거대한 기업의 모체들이 나타났고, 우리 사회는 농경위주의 사회에서 공업과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로의 빠른 변화를 보이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현상들을 야기시켰다. 반공, 자본주의, 민주주의, 정경 유착, 빈부격차의 심화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현상들 중 중요한 것은 바로 자본주의와 빈부격차의 심화이다. 광복 이후 남한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체제를 기본으로 하게 된다. 자본주의에서 성과에 대한 측정은 “효율성”이라는 단어이고, 이 “효율성”은 최소의 투입으로 최대의 산출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 효율성을 증대하기 위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은 중공업, 대기업 중심의 성장 위주 경제 정책을 천명하게 된다. 이 때가 바로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의 유입시기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은 효과를 거두어 우리는 엄청난 속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어 낸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법. 이러한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은 빈부격차의 심화와 천민 자본주의의 만연, 전통가정의 파괴등의 부작용을 낳았고, 나아가 배금주의, 물질만능주의, 인명경시풍조를 은근히 조장하게 되었다.
이 부작용들은 교육의 측면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물질 만능주의로 인해, 빈부격차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고, 그 격차는 커져갔다. 이 격차를 뛰어 넘을 수 있는 마지막 사다리가 바로 “학습” 이른바 공부였던 것이다. 기존의 읽고 쓸 줄 알면 된다는 입장에서, 새로운 태도로의 전환은 점차 늘어만 갔다.
해방 이후 휴교 중에 있던 각급 학교가 문을 열면서 각 학교의 교육이 차질없이 시행되도록 하기 위한 미군정청의 긴급조치가 취해졌다. 당시 미군정 당국자들은 미국을 비롯한 영어문화권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거나 기독교인 한국인 협조자 필요로 했다. 그래서 락카드 대위의 협조자로 오천석(吳天錫)은 군정기에 문교차장과 문교부장 역임했다. 락카드는 오천석이 추천한 한국의 교육지도자들과 회담을 갖고, 한국인들로 구성된 자문기관인 (The Korean Committee on Education) 조직했다. (1945.9.16) 한국교육위원회는 초기 각 분야의 7명의 위원으로 구성, 후에 3가지 분야 3인을 추가하여 10인의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한국교육위원회는 후에 교육부의 모태가 된다. 군정청 최초의 자문기구로서, 1946년 5월까지 존속하면서 교육문제 전반에 대해 심의하고 결정했다. 한국교육위원회가 한 주요내용으로 학교의 인가와 개교, 일본인 직원의 해고, 학무국 요원의 추천과 기구의 구성, 교육행정관의 임명, 교과서와 교육과정에 관한 문제등을 해결했다. 제도상으로는 자문기관이었으나, 실제로는 각 도의 교육책임자나 기관장 같은 주요 인사문제를 다루는 등 자문기관 이상의 역할 수행해 나갔다. 일재 잔재의 불식(拂拭)시키고 평화와 질서의 유지, 생활의 실제에 적합한 지식 기능의 연마시키기 위하여 군정청은 1945년 9월 22일 한국교육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당면한 교육방침 결정하게 된다.「교육에 관한 조치」 발표하고 초중등학교의 개학 서둘러 추진한다. 이 때의 교육행정은 각급학교의 개교 및 임시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교원 충원 및 재교육, 새 교과서를 편찬하는 등 산적한 긴급과제들을 수습하기 위한 응급행정이었다. 그러나 자주 독립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보다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전망 하에 교육 이념을 정립하고 제도를 수립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새로운 교육제도를 구상하기 위한 조선교육 심의회가 구성되었다.(1945년.11.23) 조선교육심의회는 교육계와 학계의 지도자 100여명으로 구성되었으며 10개의 분과로 나뉘었고, 그 중 3개의 분과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군 장교들이 위원으로 동참하였다. 조선교육심의회의 발상에서 논의, 결정까지 한국 측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미군측은 조언자의 역할만 수행했다. 1946년 3월까지 약 4개월간 존속하면서 교육이념, 교육제도, 교육내용 등 한국 교육 전반에 거쳐 심의 의결하여 학무국에 건의. 군정청 학무국에서는 거의 수정 없이 실천에 옮기게 된다. 이 때 홍익인간의 개념과 민주주의의 이념이 교육이념으로 채택되었고 단선형(미국식) 학제가 심의, 정착되었다. 학기는 1년 2학기로 정했다. 신 학제는 학교 계통을 남녀 공히 학령전 교육(유치원),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 기타 특정 교육기관 등 5개 단계로 구분하고 유치원에서 대학원까지의 교육연한을 20년으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