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의학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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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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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Ⅰ. 서론

Ⅱ. 본론
1)고대, 이집트, 로마, 그리스 시대
2)중세 시대
3)르네상스 시대
4)르네상스 이후
5)현대미술

Ⅲ. 결론
본문내용
3)르네상스 시대
중세 이후 예술의 최 전성기로 불리는 르네상스 시기 이후의 미술들에서는 중세의 헤브라이즘 중심 미술에서 벗어나 인간중심의 헬레니즘 문화로 회귀하는 성향을 나타났다. 이 시기 미술에서는 점점 인간의 개성과 감성을 중시한 작품들이 등장하였는데, 이 시기에 질병에 대해 표현한 그림 들을 보면, 질병이 성인의 힘을 통해서 극복해야 하는 무서운 대상으로써 일종의 기원을 담아서 그린 작품들이 아닌, 질병 그 자체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감상을 중시해서 그린 작품들이 출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미술은 교리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전달수단으로 주목 받았다. 따라서 그리스미술처럼 서술적 기능이 부각되었고, 서술적 기능을 충실히 하기 위해 정확한 사실적 묘사가 중요시 되었다. 또한 그들은 미의 구현이란 어떤 이성적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과학적 예술이 발달하였다. 동시에 기하학, 생리학, 해부학, 원근법 등도 발전하였다. 게다가 미술교육기관이 아카데미가 설립되었고 화론이 등장하였다.
중세까지의 해부학으로부터 벗어나 인체에 대한 현대적 해부도가 나오게 된 것은 의학이 다른 분야와 협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이 해부학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이다. 인문학과 회화술의 발달, 과학의 발달이 해부학의 현대화를 가져온 동기였다. 신학 중심의 학문이 개별 학문들로 발전하고 인문학이 부흥하면서 신학적 목적론에 종속되었던 몸이 해방된 것이 해부학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고, 아울러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인 천체 모형이 종교관의 변화를 가져오면서 천체와 물질 뿐만 아니라 인체도 보편성 있는 연구의 대상으로 삼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 해부 미술학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등장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는 어떤 조직에도 가입하지 않고 혼자 작업하면서 인체를 해부하고 인체구조를 새로운 방식으로 묘사했다. 그는 기계와 건축, 토목에서 얻은 지식을 인체에 대한 연구로 발전시켰다. 레오나르도는 인체가 움직이는 구조를 파악 했으며,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인체에 대한 지식을 확장시킬 수 있는 참신한 태도와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세심한 묘사력은 뛰어난 통찰력을 요구하며, 그 속에 담긴 상상력은 우리로 하여금 인체의 물질적인 구조를 세상의 다른 존재들과 동일한 차원에서 인지하도록 인도한다.
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여체의 기본적인 내장, 혈관, 방광-자궁의 구조)소묘로서 인체 해부와 동물 해부를 결합했던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으며 실제와는 거리가 멀지만 쌍각 자궁을 매력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레오나르도가 죽고 24년이 지난 1543년에 라는 뛰어난 저서를 스위스 바젤에서 발표했다. 이 저서에 의해 갈레노스의 해부학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해부학에 대한 저술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당시의 과학 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레오나르도가 자신의 연구를 책으로 펴내지 않았으므로 베살리우스는 그의 업적을 모르고 있었다. 레오나르도가 죽은 뒤 그의 연구 노트는 몇 세대 동안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전해졌을 뿐 300년 동안이나 잊혀져 있었다. 19세기 이전까지 이 연구 노트는 사본의 형태로도 발간되지 못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레오나르도의 연구 노트는 오늘날까지 그려진 해부학 그림 중에서 가장 탁월한 소묘로 간주되고 있다. 이 연구 노트가 마침내 세상에 알려지자 레오나르도의 그림들은 19세기와 20세기 의학계의 인체 묘사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해부학을 발전시킨 세 명 중 마지막인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는 다르게 미술가로서 인체의 표현을 보다 정밀하게 하기 위해 해부학을 공부하였다. 미켈란젤로가 해부학에 정통하였다는 것은 그의 그림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그의 대표작인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보면 ‘아담의 탄생’ 부분의 조물주의 어깨 부분에서는 두개골의 단면을 찾을 수 있고 ‘웃시야, 요담, 아하스’ 에서는 신장의 해부도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다소 억지스러운 설명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해부학에 정통한 미켈란젤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미켈란젤로는 그림 속에 자신의 얼굴이나 동료 예술가들의 모습을 숨겨 놓는 등의 장난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1594년 최초의 해부학 극장이 히에로니무스 파브리키우스에 의해 파도바에 세워졌다. 이 극장은 새로운 학문적 목적을 위해 해부대를 건물 내부 깊숙이 설치하는 등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이곳에서 추구되었던 해부학의 철학적 의미는 당시 의학의 위상을 높이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16세기 말에 해부학은 일대 유행하는 학문이 되었고 유럽의 인재들이 파도바, 볼로냐, 라이덴의 해부학 교실에 몰려들었다. 교육적인 면에서 그리고 건물의 구조적인 면에서 해부학 극장은 일부 한정된 사람들만의 영역이 되면서 해부학은 새로운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고 새롭고 신선한 개념이 창출되는 안전한 공간으로 변했다. 그러나 인체 해부학을 연극적인 목적에 이용하는 세태는 당분간 계속되었다.
1594년 파도바 대학에 세워진 이 목조 극장은 새롭고 독특한 건축 형식을 선보였다. 이 건축 형식은 18세기에 건립된 여러 대형 오페라 극장 등 다양한 형식으로 모방되고 발전되었다. 좁은 관람석을 여러 층으로 높게 설치한 설계방식은 건물 내부의 중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