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된 제가 -북학의를 중심으로 본 박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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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제가된 제가 -북학의를 중심으로 본 박제가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생애
2.현실인식
3. 해결 방법(개혁론)-북학의
(1). 농업
(2). 상업 개혁
(3). 존주론(명분론)
4 평가
본문내용
1. 생애

1750(영조22) 우부승지 박평의 서자로 태어남.
1766(영조52)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과 합작한 시집 「건언집」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조선의 시문사대가로 알려짐.
1777(정조 1) 즉광시에 합격.
1778(정조 2) 사은사 채제공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중국을 다녀옴. 돌아와서「북학의」「내․외편」 저술.
1779(정조 3) 정조에 의해 이덕무, 유득공, 서리수와 함께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됨. 여기서 14년동안 근무.
1790(정조14) 진하사 황인점을 따라 유득공과 함께 중국에 감. 귀국 중에 정조의 명으로 동지사로 다시 북경에 감.
1792(정조16) 부여 현감이 됨.
1794(정조18) 춘당대 무과 별시에 장원으로 합격, 오위장에 임명됨.
1795(정조19) 연평 현감이 됨.
1799(정조23) 「진북학의」를 작성하여 상소문으로 올림.
1801(순조 1) 사은사, 윤행임을 따라 유득공과 함께 중국을 다녀옴. 귀국 후, 동남 성문 밖 흉서사건에 사돈 윤가기가 주모자로 지목되면서, 그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됨.
1805(순조 5) 대비의 특명으로 서울로 돌아옴. 사망.

그는 소전에서 스스로의 생김새를 “물소 이마에 칼날같은 눈썹을 하고, 눈동자는 검고 귀는 하얗다”고 하고있는데 당찬 체구에 야무진 눈빛을 지닌 무인의 강인한 기상이 보였다고 합니다.






2.현실인식
박제가의 현실인식을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가난이었습니다. 그의 시중 한 부분에서 이같은 인식을 잘 엿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가난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일마다 중국만 못하다. 다른 것은 고사하고 그 의식의 풍족한 것은 도저히 그들을 당하지 못하였다.”
“우리 나라의 일반 백성들은 모두 조석거리가 없어 열집 있는 마을에 하루 두 끼니를 먹을 수 있는 자가 몇 사람이 못된다.”


--->따라서 박제가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잘 살수있을까? 하는것이었습니다. 기존 유학에서는 이용, 후생. 정덕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박제가는 이용이 되면 후생이 되고 그래야 정덕을 이룰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衣食足而知禮節,즉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라는 (관중)의 말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3. 해결 방법(개혁론)-북학의
그래서 가난의 해결 방법으로서 제시한 것들이 북학의에 나와있습니다.
(1)학중국
그의 주장은 주로 “학중국” 즉 “중국을 배워야 한다”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예법 문화를 써서 야만 풍속을 변화시킨다는 말은 들었으나 야만 풍속에 변화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진량은 초나라에서 태어났으나 주공과 중니의 도를 기뻐하여 북쪽으로 가운데 나라에 가서 배웠거늘 북쪽지방의 학자도 혹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