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작가론] 김사량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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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대작가론] 김사량 연구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시대와 그의 김사량
Ⅱ. 경계적 주체로서의 김사량 -를 중심으로
Ⅲ. 김사량의 이중언어 글쓰기
Ⅳ. 김사량 연구 : 민족문학과 탈민족주의
Ⅴ. 과
Ⅵ. 「빛 속으로」를 통해서 바라본 『노마만리』 ―김사랑의 중국 망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본문내용
0. 들어가며
‘김사량’이라는 작가 혹은 인간에게 허락된 자리는 얼마 전까지 문단의 구석, 그늘지고 추운 자리뿐이었다. 일제시기에 문필활동을 했고 일본에서 등단했다는 이유로 그는 친일문학가라는 이름과, 월북했다는 이유로 월북작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주홍글씨 2가지를 동시에 가진 이유로 김사량을 언급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도덕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 그의 문학 내부에 존재하는 저항적인 면모나 민족주의적인 요소 등에서 보이는 북의 이데올로기와 맞지 않는 부분들, 그의 인생역정들이 재조명 받으면서, 김사량은 그가 떠안고 있던 2개의 치명적인 이름표들과 어느정도 작별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재조명에 따라서 김사량이라는 작가의 존재가 이전보다 더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작가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 발표에서는 김사량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하지만, 5~6분이라는 한정 된 시간에 또한 그 사람의 약력만을 소개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았을때, 김사량에 대해서 개괄하되 조금 다른 방식으로 개괄을 하고자 한다. 김사량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는 것이다. 1914년에서 1950년이라는 한국 근·현대의 격변기를 살았던 그 작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를 살펴보면서 그 속에서 존재했던 김사량과 시대를 살아가며 그가 냈던 시대에 대한 파열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즉, 이번 발제문과 발표는 라기 보다는 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1. 일제 시기와 김사량
출생 : 일제시대에 태어나지 않았지만 일제시대를 경험하였던 이광수, 홍명희 등과는 다르게 김사량은 그 출생부터 일제시대를 딛고 있었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일제시대 중에서 헌병경찰통치로 불리는 1기의 시대이다. 조선에 대해서 일본은 강압적인 정책을 취한 시기였다. 하지만, 이 시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는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은, 통치체제를 모색해가던 시기였다.
김사량의 본명은 김시창이고 평양에서 출생했다. 양친의 이름은 알려져있지 않지만 그의 어머니는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만주에 지점을 가진 백화점을 경영하던 사업가로 알려져 있다. 김사량을 포함하여 2남 2녀의 4남매였고 그 중에서 셋째로 태어난 김사량은 유년 시절을 유복하게 자랐을 것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일본군 배속장교 배척운동과 평양고등보통학교 퇴학 : 1931년은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식민지배가 3기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일제는 각 학교에 장교들을 파견해서 그 학교를 직접적으로 통제하려 했다. 3·1운동 이후 문화통치기에는 잠시 폐지했던 이 정책을 부활하면서 일제의 식민 지배는 더욱 악랄해졌다. 김사량은 학교에 장교를 배치하는 조치에 반발하다가 퇴학을 당했던 것이다. 김사량의 이러한 움직임은 거의 2년 전에 발생했던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움직임을 계승하는 시도로 계획되었다고 한다.
조선어 사용의 금지 : 김사량은 동경제국대학의 독문과에 다니고 있을 시기이지만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 육군대장은 1936년 일본어만을 사용해야한다는 조치를 발표했다. 본격적인 전쟁을 실시하기 전에 조선을 일본에 완전한 식민지로 종속시킴으로써 조선과 다른 국가들의 연합을 끊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일상생활과 학교 등에서 엄격하게 사용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말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던 조선어학회는 1938년 많은 인사들이 구속되고 탄압받으면서 그 성격이 변질된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발발 : 1937년 중·일전쟁이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되었고 1940년대에는 전쟁이 아시아, 태평양으로 확대되면서 일본의 태평양전쟁이 시작·본격화되었다. 일본은 전쟁체제로 접어들면서 더욱 악랄한 정책들을 수행했다. 일제는 한국에서 막대한 미곡을 공출해갔으며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쇠붙이 등도 공출의 대상이었다. 또한, 이 시기는 조선인들에게 황국신민의 서사를 암송하게 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창씨개명을 실시하던 일제의 무자비한 통치시기였다. 징병제, 징용제도 실시되었고 ‘위안부’와 같은 비인간적인 일들도 서슴지 않고 행해졌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