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의 이해 퇴계 이황 이황 철학 이황 소개 이황 이기론 이황 수양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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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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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퇴계 이황
1. 퇴계 이황은 누구인가?
- 이황이 살던 시대
2. 이황의 여러 가지 모습
- 학자, 사상가의 모습
- 교육자의 모습
- 문학가, 서예가의 모습
- 생활인으로서의 모습
3. 이황의 철학
- 이황의 이기론
- 이황의 수양론
- 이황의 심성론
4. 나가며
퇴계 이황
1. 퇴계란 누구인가???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李)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1527년(중종 22) 향시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와 자주 왕래하며 놀고, 이 해에 귀향 도중 김안국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하다. 1543년 10월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명종 1)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하여, 1548년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1552년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1556년 홍문관부제학, 1558년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1543년 이후부터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우리가 가장 잘알고 있는 천원지폐의 이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