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위한 중용의 삶 -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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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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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행복을 위한 중용의 삶
Ⅰ.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적 개관
1. 목적으로서의 행복
인간의 행동은 그것에 적합한 목적을 지향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믿었다. 이러한 목적들은 비록 가치는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선을 결코 달성할 수 없다. 궁극적인 목적이 되기 위해서 하나의 행위는 “자족적”이며 “궁극적”이어야 하는데, 그러한 행위는 “항상 그 밖의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며”, 그것은 또한 인간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마도 “행복”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이라는 사실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사실 우리는 쾌락이나 부나 명예를 추구할 때 “그것들의 도구성을 통해 우리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행복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선”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과 마찬가지로 행복도 인간에게 고유한 기능의 수행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행복이란‥ 영혼이 미덕의 실현으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영혼은 어떤 방식으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작용하는가? 도덕성의 보편 법칙은 “정의로운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이는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이 비이성적인 부분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영혼의 비이성적 부분이 통제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의 구성 요소와 메커니즘을 살펴볼 때 명백히 드러난다.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으로서의 욕망은 자아의 외부에 있는 사물들, 즉 대상물이나 다른 인간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외적 요소들에 반응하는 욕망의 두 가지 근본적인 형식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사랑”이며, 다른 하나는 “증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욕정”과 “격노”는 이러한 형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 욕정적 감정이 인간으로 하여금 사물이나 인간을 갈망하도록 한다면, 격노의 감정은 그것들을 피하거나 파괴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사랑이나 증오, 당기거나 밀어냄, 창조와 파괴, 이 모든 감정이나 능력은 이내 “혼란으로 치닫는다.” 그 감정들 안에는 어떠한 척도나 선택의 기준도 내포되지 않는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부나 명예나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관련시킴에 있어서 선택의 방식이 필요하다.
2. 덕을 위한 습관화
올바른 방식의 행위는 결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도덕적 행위는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어떠한 것도 자연적으로 그것의 본성과 대립되는 습관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은 습관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올바르게 사유하는 습관, 올바르게 선택하는 습관, 올바르게 행동하는 습관이 도덕의 발전과 관계하는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파악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덕은 일시적으로, 혹은 순간적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연마된 이의 행위 그것을 의미하였다.
3. 중용(golden mean)으로서의 덕
감정은 매우 넓은 행동의 영역을 갖기 때문에, 인간은 과다와 과소의 조화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적절한 중용(中庸)을 발견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설하였다. 덕은 우리의 다양한 감정들과 행동들에 관련되는데, 그 이유는 그 감정들 속에 과다함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은 공포, 자만, 색욕, 갈망, 연민, 쾌락, 고통과 같은 감정을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느낄 수 있으며 이 두 경우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감정들을 느껴야 할 때 우리는 중용을 취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밝혔다. 이는 인간에게 있어 최상의 상태이며, 이러한 상태는 곧 덕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따라서 악덕은 과다나 과소의 극단이며 덕은 그것의 중용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감정들이 통제되고 행동들이 인도되는 것은 영혼의 이성적인 힘을 통해서이다. 예를 들면 “용기”의 덕은 두 가지의 악덕, 즉 공포(과소)와 만용(과다)의 중용이다. 그러므로 덕의 상태는 “심사숙고에 의한 선택을 실행하는 상태이며, 상대적인 중용에 머무는 상태이고 이성에 의해 결정되는 상태이며, 실천적이며 지혜로운 인간이 결정하는 상태이다.”
중용은 만인에게 동일하지도 않으며 모든 행동에 대한 하나의 중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중용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각각의 인간에게 상대적이다. 식사의 경우에 있어 성인 운동가와 어린 소녀에게 알맞은 식사량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 양자에 있어서도 적절한 중용이 존재하는바, 그것은 “절제”이다. 여기서 양극단, 즉 포식(과다)과 절식(과소)은 악덕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하게 돈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낭비와 인색의 중용으로서 “관대”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인 양이 아니라 사용자의 재산에 따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용에 대한 이론은 자주 아리스토텔레스가 절제에 대한 이론을 주장하기 위하여 마련한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에게 항상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것을 피하고, 절제 있게 느끼고 행위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가 고려하여야 할 것 중의 하나로 상황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갖는 감정의 총량이 때로는 중용을 결정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지만 중용을 결정하는 것에는 단지 감정의 분량을 넘어서는 훨씬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중간적인 것으로서의 중용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것에 대하여, 적절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목적을 위하여, 적절한 방식으로" 분노, 동정, 신뢰 등의 감정을(물론 다른 감정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가지는 문제이다. 이러한 다양한 측면에서 평가할 때 이성이 어떤 특별한 경우에는 행위자가 극단적인 신뢰를 표시한다던가 커다란 동정심 또는 심한 분노를 느끼는 것이 오히려 중용이라고 얼마든지 결정할 수 있다. 따라서 중용은 절제에 관한 이론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단지 자신의 감정이나 행위에 있어 상대적인 중용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행위하면서 스스로 쾌락을 느껴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해서 육체적인 쾌락을 절제하면서(즉 적절한 경우에, 적절한 분량으로) 그로 인해 고통을 겪는(불쾌함을 느끼는 ) 사람은 실지로 쾌락을 절제하였다 할지라도 결코 절제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두려운 상황에서 그것을 굳건히 견디기는 하지만 이로 인하여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은, 실지로 잘 견뎌 냈다 할지라도, 비겁한 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덕이 있게 행위한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