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명을 받들던 사람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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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을 받들던 사람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왕명을 받들던 사람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1533
젊은 프랑스 주교가 영국에 머물던 젊은 프랑스 외교대사를 방문한다. 그들은 친구였고, 작가는 우리에게 그들이 나눴던 음악, 수학, 천문학 등의 흥미를 보여준다. 죽음 또한 그림 속에 숨겨져 있다. 이 2인 초상화 (207 x 209cm)는 런던의 국립박물관에 있다.
공식적인 초상화 한 점이 있다. 그림 속 두 남자의 몸가짐, 태도, 진지한 풍채는 그들을 40세 정도로 보이게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보다 훨씬 어리다. 왼쪽에 있는 남자는 스물아홉, 오른쪽 남자는 스물다섯. 16세기의 평균수명은 오늘날보다 짧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어릴 때 중요한 직책을 맡곤 했다. 둘 중 한 사람은 이미 주교이고, 나머지 하나는 영국 궁정에 파견된 프랑스 대사이다.
프랑스 왕으로부터 종종 대사의 임무를 위임받기도 했던 그 성직자는 친구인 외교관을 방문하고 있다. 둘은 외교단 안에서 그들이 차려입은 옷차림새에 따라 “lhomme de robe courte(짧은 옷을 입은 사람)”와 “lhomme de robe longue(긴 옷을 입은 사람)”라고 각각 다르게 이름 붙여진 다른 영역을 대표한다. 짧은 망토를 입은 사람들은 세속적인 외교 대사였고, 긴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교회에 몸담고 있는 성직자들이었다.
16세기에 왕명에 의해 외교적인 임무를 띠고 파견되는 것은 기실 명예로운 일이었으나, 그다지 기쁜 일은 못되었다. 무엇보다도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왕은 성직자와 귀족에게 봉토와 녹(祿), 수당을 지급했다. 그 반대급부로 이것들은 어쩔 수 없이 봉직을 수행하는 데에 쓰여야 했는데, 그들의 의무는 종종 그들의 수입 범위까지 달하는 정도였다. 따라서 그들은 외국 땅에서 머무는데 필요한 비용을 그들의 사비로 충당하도록 요구되었다. 한번 그곳에 머무르면, 그들은 마땅히 정중함과 예의를 다하여 대접받았지만, 의심도 함께 받았다. 외교관들은 공식적인 임무와 함께 스파이의 목적을 띠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482년 베니스에서는 외국에서 온 외교관에게 공적인 일에 관해 말을 꺼내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한 스위스의 대사는 자신이 런던에 머물렀을 때 외국인 대사에게 말을 걸었던 국회의 한 위원이 직위를 잃을 뻔한 적도 있다고 적고 있다. 확실히, 방문하고 있는 나라에 관해 가능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외교관의 주된 임무 중 하나였다. 신문이라는 것은 당시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당대의 안내서나 회고록은 외교관에게 요구되는 자질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려준다. 우선 적절하게 대표되는 용모를 지녀야 한다. 입은 옷은 충분히 훌륭하고 적절히 값이 나가야 하며 그 옷의 주인에 알맞은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는 설득력 있는 언변과 수준급의 라틴어 실력(당시의 공통어였던)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과학자나 예술가와 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교양이 풍부해야 한다. 행동거지는 점잖고 매력적이면서도 너무 호기심이 넘쳐흐르면 안 된다. 최악의 소식을 들으면서도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줄 알아야 하며, 필요할 때는 협상을 늦추거나 빨리 진행하는 데에 능숙해야 한다. 사생활은 어떠한 사소한 스캔들도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정도로 흠잡을 데 없어야 함은 물론이요, 아내는 당연히 가정에 머무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능력 있는 요리사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로 인식되었는데, 좋은 음식은 종종 일급정보에 접근하기 쉽게 했기 때문이었다.
16세기는 근대식 외교의 요람이었다. 이전의 신성로마제국 내의 유럽 국가의 사안은 주로 황제에 의해 지휘되었으나 이미 이러한 체제는 권위를 많이 잃어버린 상태였다. 대신 두 나라간의 상호협정이 중요하게 떠올랐고 이에 따라 외교술 또한 그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그러나 영원한 대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외교적인 임무는 몇 주 혹은 몇 개월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바뀌게 되지만, 당시에는 아직 그렇게 외교 정책이 상호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장기적인 관계를 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단기간의 성공이 더욱 중요했다. 어떤 계약이 더 이상 나라의 이익을 충족시키지 않을 때에는 바로 깨져버렸다. 이른바 불안정의 시대였다. 권력의 균형은 달마다 바뀌었다. 장기간 제휴를 보장받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있기는 했다. 결혼이 그것이었다.
16세기의 변화무쌍한 동맹관계의 구조는 약혼과 파혼, 결혼과 이혼의 기록에 잘 반영되어 있다. 영국의 왕 헨리 8세는 젊어서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과 혼인했다. 그녀는 강력했던 스페인의 왕 찰스 5세의 숙모였다. 헨리와 캐서린은 딸 메리(Mary)를 낳았고, 그녀는 나중에 스페인의 찰스 5세와 약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메리가 아직 어린 아이일 때, 찰스 5세는 포르투갈의 왕녀였던 이사벨라(Isabella)와 결혼해 그의 부와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이전의 약혼을 무효화했다. 한편 찰스 5세의 힘이 너무 커지고 있다고 생각한 헨리는 그 자신 또한 프랑스와 연(緣)을 맺고자 했다. 그가 재혼을 하기 위해서는 전 부인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하는 교황의 선언이 필요했다. 그러나 교황은 1527년 이후 찰스 5세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헨리의 결혼을 무효화해줄 수 없었다. 상황은 영국의 왕좌 위에 프랑스인 공주보다 영국의 귀족 출신 여인 앤 불린(Anne Boleyn)을 앉히고 싶어 했던 영국의 추밀원(樞密院)에 의해 더욱 복잡해졌다.
1533년 봄 프랑스의 대사가 런던으로 보내진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체류 중에 대사는 그의 친구와 함께한 자리에서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한스 홀바인은 모자이크 세공을 이용하여 그의 그림의 대상이 서 있는 영국 땅에서 초상화를 그리게 된 경위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세공장식은 이탈리아의 장인에 의해 새겨져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성스러운 바닥에 남아있다. 오늘날, 그 바닥은 상당히 닳고 없어져 커다란 카펫에 의해 덮여 있어 오직 카펫의 모퉁이에서만 본래의 장식을 볼 수 있다.
민감한 사명을 띠고 온 귀족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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