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한국 전쟁에 관한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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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한국 전쟁에 관한 시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들어가며
우리나라 근대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중 하나인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 민족사에서 전례가 드문 동족상잔 이였고, 당시 세계를 양분하였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 이였으며, 향후 우리 근현대사의 경로 및 동북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쟁을 통하여 남북한은 수많은 인명손실, 재산손실, 이산가족 문제, 산업시설 파손 등의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남북한의 국민들에게 엄청난 아픔과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였던 세계 여러 국가들 또한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다. 반면에 한국전쟁에 간접적으로 참여하여 이득을 보는 국가도 있었으며, 전쟁을 통해 이득을 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근현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인 한국전쟁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단지 어려서부터 자주 들어왔던‘한국전쟁은 북침에 의해서 발생하였으며, 모든 원인과 책임은 북측에 있다.’고 듣고 배웠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전쟁을 북한으로 인한 민족상잔의 전쟁 이였다고 바라고보 있는 사람이 많다. 따라서 우리 근현대사 및 동북아 정세에 큰 영향을 준 한국전쟁을 보다 잘 알기 위하여 당시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던 국가의 시각과 입장과, 한국전쟁 당시를 살았었던 사람들의 시각과 입장, 그리고 한국전쟁을 경험하지는 못하였지만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지도자였던 김구선생님의 시각과 입장에서 상상해보고 생각해 봄으로써 한국전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국가들의 시각
1) 미국의 시각 - 냉전적 사고와 대외전략의 일환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국의 트루먼은 UN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을 침략국으로 규정하고 UN군의 파병을 결정했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24사단 21연대의 스미스부대를 시작으로 수만 명의 병력이 한국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쟁이 벌어진 3년간 미국의 유일한 목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 - 나중에 전쟁의 종결로 바뀌었지만 - 이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관점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시각을 고찰하는 것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의 한반도에 관한 미국의 대외전략을 알아보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한반도에 대한 시각에 대해 국무성을 중심으로 한 NC와 군부의 시각이 서로 달랐으며 당시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아직 공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역할을 분석한 대표적인 이론이 부르스 커밍스의 수정주의 이론이다. 수정주의 이론에서는 에치슨라인의 후퇴, 국가안전보장회의의 문서NSC68, 남한의 웅진반도 공격 등을 이유로 미국이 의도적으로 남한의 군사력을 약화시켜 북한과 소련의 침공을 이끌어 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기반으로 한국전쟁의 미소의 대리전으로 보고 김일성의 전쟁발발을 중요시한 전통주의를 비판한다. 하지만 수정주의는 신좌파적 관점에 입각한 목적론적 해석으로 미소, 남북 간의 균형을 상실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국전쟁에 있어 미국의 주도적인 역할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전통주의와 수정주의 양자의 시각에서 벗어난 (후기수정주의는 한반도 내부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음으로 제외한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시각을 제기해 본다면, 소련에 대한 미국의 자체적인 분석에 의거한 극동정세파악이 될 것이다. 2차 대전의 종전 직후부터 유럽에서의 미소 간의 군사경쟁은 격화되었다. 양국은 주전장을 유럽으로 생각하였으며 유럽을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를 구축하였다. 극동은 제2전선, 후방전선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미국은 유럽에서는 지상 전력을, 극동에서는 해상력과 제공권 장악을 무기로 소련을 제압하는 것을 기본군사전략으로 채택하였다. 그러므로 소련과 연결된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은 미국으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 또한 미국은 45년 원폭을 개발해 실전에서 사용하였으며,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50년대 후반쯤이나 될 것이라는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대외원조는 47년을 기점으로 한계상황에 다다랐고 원조 량을 유지하기 어려운 시점에 이르렀다.
즉 미국의 전략적 견지에서는 한반도의 가치가 그리 높지 않았던 것이다. 이가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 47년의 에치슨라인의 후퇴와 48년 주둔미군의 철수이다. 하지만 49년이 들어 상황은 급변한다.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여 미국의 군사적 우위는 위태로워 졌으며 남한에서 민중봉기와 게릴라가 빈발하여 남한의 민주적 정권이 위기에 몰렸다. 이승만 정부는 미국에 대해 군사적 원조를 재촉했으나 아직까지 미국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북한과의 군사적 충돌을 불사하고, 미국 내부의 군부에서도 소련과의 전쟁을 피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분위기가 퍼져나가, 국무장관 케난의 뒤를 이은 니츠 국무장관의 각료들은 NSC68 (국가안보를 위한 미국의 목적과 계획)을 제시하여 과거의 경제봉쇄와 군사적 압박정책에서 벗어나 군사적 봉쇄라는 강경한 계획을 보였다. 세계 어느 지역이든 공산주의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면 미국이 곧바로 군사적 개입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NSC68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인 50년 9월 채택되어 한국전쟁 종결까지 미국의 대공산 전략의 핵심이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를 정리하면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전략은 대소전략, 즉 냉전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국내적으로 2차 대전 이후 지속된 군비지출과 재정적자를 만회해 보고자 하는 소극적 의도도 숨어 있었다. 이에 대한 근거는 미소 간의 군사적 우위에 대한 분석이 되었으며 49년 이전에는 군사적 자신감에 기초해 한반도에서의 중립전략이 대세였으나, 소련의 핵개발, 북한의 군사력 증강, 남한에서의 혼란상에 근거해 남한의 군사력을 원조해주는 방향으로 바뀌었으며 전체적으로는 군사적 개입을 불사하는 대외강경정책을 채택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전략정책의 변화를 편견에 기초하여 수정주의와 같이 북한과 소련의 전쟁을 도발한 음모론으로 파악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2) 소련의 시각 - 공산주의의 세계적 확산과 대외전략의 실험으로서의 한국전쟁
소련은 미국과의 군사적 경쟁을 벌였으나 직접적인 대결은 가급적 피하려고 하였다. 이는 미국에 대해 군사적 우위를 자신할 수 없다는 자체적인 분석에 기초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련은 해방 전선 전략 전술을 바탕으로 중국과 동유럽, 쿠바 등에서 민족적 공산주의의 확산을 꾀하여, 이 같은 시도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북한의 경우, 소련과 맞닿아 있으며 미국의 극동기지인 일본과 연해 있다는 지리적인 측면에 있어서 소련의 스탈린에 있어서 여타 위성국가에 비해 좀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즉 미국과 소련의 대외전략에서 유럽과 극동을 평가가 미묘하게 달랐던 것이다. 소련은 북한의 김일성에 대해 북한점령에서 정부수립, 군비증강에 있어 전폭적인 지원을 하였다. 북한에 대한 소련의 지원은 최근 공개된 소련의 비밀문서를 통해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46년 군사고문단의 파견을 시작으로 48년 조선인민군의 창설, 공군전력과 포병, 기갑전력의 지원, 사단-군단급 군사훈련의 참관 등 북한에 대한 소련의 군사적 지원은 소련이 남북, 혹은 북한과 미국 간의 전쟁의 가능성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스티코프 중장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