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면한 상황에서의 적절한 행동 - 초등도덕교육론

 1  직면한 상황에서의 적절한 행동 - 초등도덕교육론-1
 2  직면한 상황에서의 적절한 행동 - 초등도덕교육론-2
 3  직면한 상황에서의 적절한 행동 - 초등도덕교육론-3
 4  직면한 상황에서의 적절한 행동 - 초등도덕교육론-4
 5  직면한 상황에서의 적절한 행동 - 초등도덕교육론-5
 6  직면한 상황에서의 적절한 행동 - 초등도덕교육론-6
 7  직면한 상황에서의 적절한 행동 - 초등도덕교육론-7
 8  직면한 상황에서의 적절한 행동 - 초등도덕교육론-8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직면한 상황에서의 적절한 행동 - 초등도덕교육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직면한 상황에서의 적절한 행동

1. 선정이유
2. 이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3. 나의 경험사례와 분석
사례1
사례2
4. 초등학교 수업 적용과 교육활동
도덕교과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의 덕 적용하기
아침시간 영상을 통한 생활지도에 활용하기
5. 후기
6. 참고 문헌
1. 선정 이유
현대 사회에서는 수많은 복잡한 행동이 만연하고 있다. 다양한 가치들이 공존하고 있고 이에 따라 많은 갈등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회 현실 때문에 사람들은 하루에도 다양한 문제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문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위기를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사실 문제 상황을 해결해야 할 객관적인 정답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문제 상황에 대처해야할 방법을 결정하고 그것을 행하고 나중에 자신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후회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다.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도 물론 하루 중에 있었던 직면한 상황에 대한 자신의 대처 능력을 대견스럽게 여기고 스스로를 칭찬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하루 동안 있었던 자신의 일에 대해서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을 했는지 후회를 하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상황들은 왜 사람의 속을 썩이는 것일까? 그 이유는 직면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여야 옳은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판단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기준은 없으면서 사람들은 직면한 상황에 대한 대처행동에 대해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따지고 있다. 참으로 모순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혼란스러운 상황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였던 중용의 덕을 적용하면 사람들이 직면한 상황을 보다 잘 대처할 수 있으리라 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의 덕은 사람들이 직면한 상황에 대한 대처 방법을 강구할 때 보다 현명한 판단을 내리도록하기 위해 적절한 때,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방법으로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성인뿐만 아니라 초등학생들도 상황을 직면하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할 지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학급 쉬는 시간에 초등학생 A와 B가 서로 시비가 붙었다. 그러다 상황이 과격해지고 A와 B는 폭력을 사용하며 다투기 시작했다. 싸우는 도중 A가 B에게 싸움에서 밀리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던 A의 친구 C는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을 했다. 그러다 C는 A가 당하고 있는 광경을 차마 보지 못하여 싸움에 끼어들어 B에게 폭력을 가했다. 그 후 C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초등학생들은 많은 문제 상황에 접하게 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 지 판단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이 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초등학교 도덕 교육 지도 방법에서 여러 가지 가상의 문제 상황을 초등학생들에게 접하게 하고 이에 따른 대처 방안을 교육시킬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의 덕을 접목시킨다면 학생들이 직면한 상황을 대처하는데 있어서 효과적인 교육을 할 것이라고 본다. 또한 앞으로 성인이 되었을 때 더욱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에 초등학생들에게 적절한 판단의 기준을 제시해주는 것이 초등 도덕 교육에 있어서 중요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2. 이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육체의 상태 대부분이 “과도함이나 부족함에 의해서 파괴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중용의 이론을 전개해나간다. 아리스토텔레스 말하는 “적절한 분량”이란 과도함과 부족함 사이의 중용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덕이라고 불리는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을 초등도덕교육에 접목시키는 것은 학생들의 도덕 교육에 많은 발전을 도모할 것이라 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절제와 용기, 그 밖의 다른 덕들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무슨 일에서나 뒷걸음치며 무슨 일이나 두려워하고 자신의 설자리를 확고하게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비겁한 자가 될 것이다. 반면에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든 것과 정면으로 대결하려는 사람은 무모한 자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온갖 쾌락을 탐닉하고 어떤 것도 삼가지 않는 사람은 방탕하게 되며 마치 촌뜨기처럼 모든 쾌락을 피하려고만 하는 사람은 무감각하게 된다. 따라서 절제와 용기는 과도함과 부족함에 의해서 파괴되며 중용에 의해서 유지된다.
중용으로서의 덕이 지니고 있는 주요한 특성 중의 하나는 그것이 절대적인, 산술적인 중간점이(예를 들면 6이 2와 10 사이의 산술적인 중간점이듯이) 결코 아니며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어떤 것이 아니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들 각각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중간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상대적인 것으로서의 중용은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각자가 지니고 있는 변화하는 욕구나 상황에 따라서도 서로 달라진다. 어떤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상대주의자다. 또한 그는 어떤 “덕의 규칙들”이 존재하며 이 규칙을 모든 경우들에 적용하여 모든 경우들에서 올바르고 덕이 있는 감정이나 행위가 무엇인지를 밝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절대주의자의 입장을 거부한다. 하나의 동일한 행위가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의 덕을 드러낼 수도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전히 객관주의적인 입장을 유지한다. 즉 만일 어떤 행위가 한 개인의 경우에 덕을 드러낸다면 그 행위가 그렇다는 점은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그 개인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으며 같은 것을 필요로 하고, 다른 여러 측면에서 유사한 처지에 있는 다른 어떤 사람도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행위하여야 하며 이성이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여기서의 논점은 많은 경우에서 사람들은 각각의 상황을 바탕으로 덕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요소에 따라 서로 다르게 행위하게 되지만 이와는 달리 사람들이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 이성에 의해서 그들에게 덕이 있는 행위로 부과되는 유사한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용에 대한 이론은 자주 아리스토텔레스가 절제에 대한 이론을 주장하기 위하여 마련한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에게 항상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것을 피하고, 절제 있게 느끼고 행위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가 고려하여야 할 것 중의 하나로 상황이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철저히 정의롭지 못한 상황이 발생하여 우리가 그것을 보고 극단적인 분노를 느끼게 될 수도 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상황에서는 극단적인 분노를 느끼는 것이 정당할 수도 있다. 우리가 갖는 감정의 총량이 때로는 중용을 결정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지만 중용을 결정하는 것에는 단지 감정의 분량을 넘어서는 훨씬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중간적인 것으로서의 중용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것에 대하여, 적절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목적을 위하여, 적절한 방식으로” 분노, 동정, 신뢰 등의 감정을 가지는 문제이다. 이러한 다양한 측면에서 평가할 때 이성이 어떤 특별한 경우에는 행위자가 극단적인 신뢰를 표시한다던가 커다란 동정심 또는 심한 분노를 느끼는 것이 오히려 중용이라고 얼마든지 결정할 수 있다. 따라서 중용은 절제에 관한 이론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단지 자신의 감정이나 행위에 있어 상대적인 중용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행위하면서 스스로 쾌락을 느껴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해서 육체적인 쾌락을 절제하면서(즉 적절한 경우에, 적절한 분량으로) 그로 인해 고통을 겪는(불쾌함을 느끼는) 사람은 실지로 쾌락을 절제하였다 할지라도 결코 절제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두려운 상황에서 그것을 굳건히 견디기는 하지만 이로 인하여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은, 실지로 잘 견뎌 냈다 할지라도, 비겁한 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덕이 있게 행위한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만일 이를 잘 모른다면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중의 하나를 잘 설명해 준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는 절제 있는 행위를 함으로써 절제 있게 되고 정의로운 행위를 함으로써 정의롭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정의롭고 절제 있는 것을 행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행위하기 이전에 이미 정의롭고 절제 있는 사람이 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한편으로 덕이 있는 행위를 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올바른 상태에서” 그런 행위를 하는 것 또는 진정으로 덕이 있는 사람들이 행위하듯이 덕이 있는 행위를 하는 것을 구별함으로써 이러한 모순을 피해 나간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절제 있는 것이라는 점을 알지 못하여 그것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도 또 그런 행위를 해야겠다는 결단을 내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절제 있는 행위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절제 있는 행위가 확고하게 고정된 절제라는 본성의 상태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거나 또는 우리가 절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절제 있는 사람은 절제 있는 행위를-즉 양극단 사이의 중용에 도달한 행위를-할뿐만 아니라 심사숙고하여 그렇게 행위하는 것이 바로 중용이기 때문에, 중용을 선택하고 그것에 따라 행위한다. 그러한 사람은 항상 그런 선택을 내리도록 이끄는-왜냐하면 정확히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용에 따르는 것이라는 점을 알기 때문에-변화하지 않는 본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렇게 행위하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쾌락을 얻는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우리가 바로 이런 종류의 절제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달리 말하자면 설령 단지 어떤 규칙에 기계적으로 따르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사람이 보여주는 예에 따름으로써 절제 있는 행위를 한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올바른 본성의 상태로부터 행위하였을 경우에만 우리는 절제라는 덕을 발휘한 것이며 이는 그러한 행위가 행위자 자신에게 쾌락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통해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