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1879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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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만해 한용운 1879 1944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승려·시인·독립운동가].
본명 : 정옥(貞玉)
아명 : 유천(裕天)
법명 : 용운
법호 : 만해(萬海, 卍海)
출생년도/출생지 : 879년 8월 29일 충청도 홍주 출생.
만해 한용운 스님은 조선 왕조 말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홍주땅(지금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한응준(韓應俊)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온양 방씨이며, 어렸을 때의 이름은 유천(裕天)이었다.
어린 유천은 6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시작하여 9살리 되던 해에 《서상기 西廂記》와 《통감 通鑑》을 독파하고 《서경 書經》에도 능통할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 이렇게 뛰어난 유천의 재능에 대하여 조용한 두메산골에서는 칭찬이 자자하게 퍼져 나갔다.
그 무렵 개화파 주도의 갑신정변(1884)이 삼일천하의 비극적 막을 내린 후일담이 충청도 땅에까지 퍼지더니, 박영효의 《건백서 건백서》가 올려지고, 자유민권사상이 대두되면서 국운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 아버지 한응준은 어린 유천을 불러놓고 세상 형편과 국내외 돌아가는 정세를 소상히 설명하여 주었다. 그는 후에 선친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1.사상
한용운은 시인만이 아니라 독립운동가였으며 불교의 석학이었고, 우리 근대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므로 그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사상은 한가지 면으로써가 아닌 시인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사상, 독립 운동가로서의 독립 사상, 승려로서의 불교 사상 및 기타 사상으로 세분화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2.문학에 대한 사상
한용운은 문학은 문예를 포함하여 문자로 기록된 모든것이란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예술이 오늘날 일부 문학자들이 말 하는 바와 같이 반드시 어느 한 계급이나 몇몇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예를 꽃에 비해서 누구나 감상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술성 그것은 어느 한 사회나 계급은 물론이요, 어느 한 시대나 현실을 그려야 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확언 하고 있다.
문학이 계급주의나 예술지상주의에 치우치지 않고 누구나 감상할 수 있는 것으로서 예술성을 강조 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조화와 질서를 강조한 중용적 예술관 이며, 문학이 인간적 존엄성을 고양시켜 주기 때문에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며 감동과 쾌락을 인간에 공여하고 감성과 이성을 조화 시켜 예술성을 얻게 하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