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과 교육원론 과제 - 데이비드 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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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데이비드 흄
Ⅰ. 동기
한 학기동안 윤리적 철학에 관한 다양한 학자들의 이론을 접하면서 도덕에 관한 철학적 논의가 정말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은 학자는 바로 ‘데이비드 흄’이었다. 칸트의 의무론, 공리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의 덕, 콜버그의 도덕발달이론 등의 윤리와 관련한 다양한 관점들 중에서 인간의 정념, 즉 ‘감정’을 도덕성과 관련된 핵심 언어로 주장한 ‘데이비드 흄’의 사상은 내게 매우 신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도덕성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인간에게 있어서 이성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인간이 이성적으로 도덕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이성이란 것에만 치우쳐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어떤 사고를 하거나 어떠한 행동을 할 때 있어서 분명히 감정이란 것을 절대 배제하여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 또한 그러한 정념을 강조한 ‘데이비드 흄’의 주장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데이비드 흄’의 사상에 대하여 탐구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Ⅱ. ‘데이비드 흄’의 생애
‘데이비드 흄’은 1711년 4월 26일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형 존과 누나 캐서린이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 조셉 홈은 흄이 두 살 일 때 돌아가셨다. 흄의 아버지는 법률가로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이었고 흄은 비교적 좋은 집안과 환경에서 자라게 되었다. 흄은 어머니와 형, 누나를 잘 따르는 성숙한 아이였고 10대일 당시, 칼뱅교도인 어머니와 다르게 기독교를 믿지 않았으나 그가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아니면 어머니가 강요하지 않았는지 이로 인한 갈등은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던 것은 유년시절 때부터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흄이 때때로 흥분하는 성격도 있다고 그의 어머니가 말했던 부분은 아무래도 흄이 경제적 독립을 할 때 표출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흄은 12살에 에딘버러 대학에 입학했고 3년간 공부했다. 보통 이 당시에는 14살에 입학하는 경우가 일상적이었는데 그보다 2년 빠르게 흄이 입학한 것을 보아 흄이 조숙한 학생이었다는 것을 또 한 번 알 수 있다. 이 곳에서 흄은 그리스어, 논리학, 형이상학, 자연철학, 윤리학, 수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이 곳에서 흄은 로크와 뉴턴에 대해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공부를 마친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흄의 가족들은 그가 아버지를 따라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고 흄 또한 가족의 기대를 생각하여 법률 공부를 하려고 했으나 그는 철학과 역사, 문학에 더욱 관심과 흥미가 많았다. 그래서 18살, 법률 공부를 접고 철학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철학적 탐구에 매진했으나 건강이 많이 쇠해졌다. 그 즈음에 삼촌의 시골집 하녀가 사생아를 낳았고 하녀는 아이의 아버지가 흄이라고 소송을 제기하여 흄은 교회 제판에 서게 되지만 잘 해결되었다. 이러한 사건을 보아 흄은 지적 탐구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20대 당시 이성에 대해 어느 정도의 자연스러운 관심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신경 쇠약과 같은 문제로 인해 잠시나마 지적 탐구에 몰두하기보다 활력적인 삶을 살고자 했다. 그 후, 1734년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브리스톨로 이동해갔고 그 곳에서 설탕 도매상의 사무직 일을 잠시 하였다가 그만두었다. 이 곳 브리스톨의 발음법에 의해 흄의 성이 홈에서 흄으로 바뀌었다. 그 후, 그는 다시 프랑스로 이동했고 그 곳에서 3년동안 생활하였다.
그는 파리에서 잠시 있다가 라인즈에서 1년, 프레헤에서 2년을 머물렀다. 데카르트가 교육받았었던 프레헤의 예수회 대학에서 그는 ‘인성론’의 책을 써내는데 몰두하였고 1737년 가을에 인성론 1,2부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런던으로 돌아와 1739년 1월 책을 출판하였고 1740년 11월 3부를 출판하였지만 책이 독자들의 호응을 크게 얻지 못하여 흄은 실망하였다. 책이 잘 팔리지 않아 흄은 금전적으로 큰 이익을 얻을 수 없었고 학계에서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이 책을 바라보았는데 흄은 그 이유가 자신의 견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오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판단하여 이를 해명하고자 ‘인성론이라는 제목의 최근의 철학적 저자의 개요’라는 책을 써내었다. 흄은 이후 1741년과 1742년에 ‘도덕과 정치논집’을 익명으로 써내었다. 이 책들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에딘버러 대학의 윤리학과 정신 철학 교수가 되려고 했으나 그가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세력들에 부딪혔다.
이후 흄의 생활은 궁핍해졌고 수입을 위해 아난달 후작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해고당해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려 했으나 클레어 경의 비서로 일하게 되면서 비엔나와 투린에 가게 되었고 이 시기에 ‘인간 오성에 관한 연구’를 저술하게 되었다. 그 책은 ‘인성론’의 1권을 부분 수정한 것으로 인과성이라는 핵심 주제가 드러나며 공간과 시간에 대한 논의가 빠져있고 ‘기적론’이라는 새로운 장이 추가되어 있다. 또한 ‘Three Essays라는 책도 출판하였는데 책들이 성공하지 못해 굴욕감을 느꼈지만 학문적 열망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영국 나인웰스로 이동하여 1751년 ‘도덕 원리에 관한 연구’를 완성하였고 1752년에는 ‘정치론’을 출판했다.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도 쓰기 시작했고, ‘영국사’ 연구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