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중세의 이단운동 11 13세기 이단과 로마교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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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중세의 이단운동 11 13세기 이단과 로마교회의 대응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중세의 이단운동
- 11~13세기 이단과 로마교회의 대응
1. 서론
중세 가톨릭교회는 전체주의적인 조직체였다. 가톨릭교회는 명확하고 포괄적인 교리 체계며 조직적인 계서제며 확실한 의례며 스스로에 대한 명확한 권위의식과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근본 요소들로부터의 어떠한 일탈도 신이 세운 세계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그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단이었다. 이단은, 13세기에 주교 로버트 그로스테스트가 정의한 바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공언되고 끈질기게 보호되는 성경의 가르침에 역행하여 인간의 지각 작용이 선택한 하나의 견해”이다. 이단은, 따라서 특수하게는, 오류투성이인 인간이 선택한 것이며, 성경에서 표현되고 합법적으로 임명된 당국자들에 의해 해석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으로 간주되었다.
중세의 이단은 중세 사회의 조건과 풍조 속에서 성장했다. 그것은 종교적 일탈자였고, 대부분 민간 종교적 일탈자였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이 속세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통해 종교적으로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고 종교적영적 삶에 완전히 몰입하고자 하는, 뿌리 깊고 떨쳐 버리기 힘든 욕구가 바로 일탈과 이단을 낳았다. 이단은 반기독교적 불신앙이나 세속화의 문제가 아니었다. 즉 복음의 진리에로, 사도들의 생활 방식에로, 그리스도의 모방에로 복귀하고자 하는 순수한 기독교적 근본주의의 충동이었다.
이 글에서는 11세기에서 13세기 말까지의 중세 정신적 대부흥 기간에 일어났던 대표적인 기독교 이단운동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로마 교회의 대응 등을 살펴보려 한다.
2. 이단 운동이 발생하게 된 배경
11세기 말에 시작되어 12~13세기까지 지속된 중세의 정신적인 대부흥은, 십자군 운동, 순례의 대폭 증가, 새로운 수도회와 수도원 분원의 증가, 유랑 설교가와 성스런 은둔자의 대중적 인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존 종교 형태와 교회 제대로는 자신들의 소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평신도들의 경건화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동시에, 교회는 스스로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11세기 말 일련의 개혁적 교황들에 의해 타락으로부터 벗어난 교황청은 자신의 집을 바로 잡는 일에 앞장섰다. 교회는 성직 매매, 주교 관할권과 성직록에 대한 세속권의 통제, 성직자의 결혼, 성직자의 음탕함 등에 대한 척결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다수 성직자들의 비도덕적인 삶과 제도의 결함에 초점을 맞추었고, 성직자를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카스트로 만든 채 교황청을 관료적법적 측면에서 조직화된 군주제로 변모시켜버린 두 가지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개혁 운동의 초점이 된 성직자들의 비행과, 교황청의 점증하는 부(富)와 관료화 및 정치화와 함께 전쟁, 송사(訟事), 정세 등에의 과도한 개입 등으로 인해, 점차 더 많이 개진되고 있던 대안적 종교관이 더 바람직하다고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 시대의 원리로,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살았던 삶(‘사도적 삶’)의 이상으로, 특히 금욕주의와 청빈과 설교를 강조하는 삶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즉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마태복음 19:21)는 복음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계율을 문자 그대로 따르려는 소망이 있었다. 이러한 삶은 일반적으로 시주나 초보적인 육체노동으로 살아가는 삶의 형태를 의미했다. 부와 재산의 포기, 고통의 감내와 영성(靈性)에서 그리스도를 모방하고자 하는 바람,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설파하는 방법을 통해 타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견해를 따르도록 권고하고픈 충동 등을 포함하였다.
이러한 사도적 마음가짐은 여태까지 지식인 성직자의 독점물이었던 성서에 자유롭게 접근하고자 하는 의욕을 고취시켰다. 라틴어 성서를 속어 성서로 번역한다든지 독학을 한 비공인 설교가들이 무차별적인 광범위한 설교를 하고 다니는 등과 같은 방법을 통해서 성서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이 이루어졌다. 또한 복음서에 있는 것만 추구하려 하였고, 망자(亡者)를 위한 기도, 영세 성사, 고해 성사 등과 같이 전통이나 학술적 합리화에 의해 인가된 광범위한 사상과 관습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권위를 성경으로 대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