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兮山) 박두진론 - 역사와 인류의 부조리에 대한 소극적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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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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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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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兮山) 박두진론
1. 생애 및 활동
혜산 박두진의 호 혜산(兮山)은 ‘있는 그대로의 산’이라는 뜻이다.
박두진은 1916년 3월 10일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봉남리에서 태어나 9세 때 고장치기라는 마을로 이주했다. 그의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은 일제 암흑기로, 청년기 지식인으로서 그는 나라를 빼앗긴 치욕과 암울한 현실, 부당한 민족 위기 현실에 당면하여 자연히 이를 구원하고 상처를 위로해 줄 메시아의 도래를 기원하게 된다. 박두진은 폭넓은 세계에서 깊이 깨달은 사람을 만나 고민의 해답을 구하겠다고 결심하여 18세 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 왔고, 이즈음에 기독교에 입문하였는데, 이로써 그의 시세계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일관되고 독특하게 통일된 새 경지를 개척하게 되는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20세를 전후, 습작을 시작하여 한때 민요조 서정시나 동시 등을 발표했던 그는 7,80편의 습작을 거친 후 1939년 《아》(芽)라는 동인지에 자유시 를 발표했다. 이 시기 그는 혼자 문장 수업을 하며 당시 시단의 감상적 퇴폐주의, 경박한 외래 취향의 모더니즘 시에 거부감을 느끼고 시대적 주의나 조류를 초월하는 영원성 있는 문학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가 자연에서 인간 생명의 근원과 영원성을 찾은 것은 이러한 결과이다. 박두진은 당시 정지용이 주간으로 있었던 《문장》에 1939년 6월 , 이 1회 추천되고, 같은 해에 이 두 번째로 추천, 다음 해 1월 , 가 정지용에 의해 추천 완료됨으로써 등단하였다. 1946년 박목월·조지훈과 《청록집(靑鹿集)》이라는 공동시집을 펴냈는데, 여기에 실린 그의 시들은 질식할 듯한 일제 말기의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자연에 친화력을 느끼며 살아가는 인간의 종교적 기다림을 노래한 것이다. 이후 〈바다로〉(백민, 1947. 2)·〈햇볕살 따실 때〉(학풍, 1949. 2)·〈산(山)아〉(민성, 1949. 5) 등을 발표하고, 1949년에 첫 개인시집인 《해》를 펴냈다. 이 시들은 자연의 순수한 생명력과 교감하면서 생기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친화력을 부드러운 산문 형식에 담아낸 것이다. 1946년에는 김동리ㆍ조연현ㆍ서정주ㆍ박목월 등과 함께 ‘조선 청년 문학가 협회’, 1949년에는 ‘한국 문학가 협회’ 결성에 각각 참여하였다. 1948년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시분과 위원장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을 역임했고, 1949년에 결성된 한국문학가협회에 가담해 민족주의계열의 문학건설에 힘썼다.
그의 시는 6·25전쟁을 거치면서 새롭게 변하는데, 시집 《오도午禱》(1953)·《거미와 성좌》(1962)·《인간밀림》(1963)에 이르러 인간의 자유와 절대자에 대한 갈망을 반복되는 관념적 언어로 읊었다. 그 뒤 4·19의거를 겪으면서 민족의 현실과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 시 〈우리는 아직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사상계, 1960.6)·〈우리들의 8·15를 4·19에 살리자〉(국제신보, 1960. 8. 15) 등을 발표했다. 이러한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격정을 보여준 시세계는 계속 이어져 시련을 겪으면서도 끊이지 않는 민족적 생명력을 읊은 〈아! 민족〉(현대문학, 1971. 4)과 같은 장시를 통하여 조국애를 적극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또 다른 암흑의 시기에 시인의 현실참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한편, 자연과 신앙의 심미적 절대화에 머물지 않고 10월 유신과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격동기에 시인이 지켜야 할 자세와 비판정신을 보여주었다.
만년에 박두진은 수석(水石)에 심취하였고, 이즈음에 《고산식물》(1973), 《사도행전》(1973), 《水石列傳》(1973), 《속수석열전》(1976), 《야생대》(1978), 《예레미야의 노래》(1981), 《포옹무한》(1981) 등을 발표하였다. 이 외에 시선집으로 《나 여기에 있나이다 주여》(1982)등과 수필집으로 《시인의 고향》(1968), 《언덕에 이는 바람》(1973)등과 시론집으로 《한국현대시론》(1970)등의 작품이 있다. 60여 년동안 10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창작하여 양적 경이로움을 보여주었다. 1998년, 청록파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그는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하였다.
2. 시기별 시적 경향 “일찍이 나는 내 인생의 시작 단계로서 초기에는 자연, 다음에는 인간, 다음에는 사회와 인류, 그 다음으로 혹 노년기라는 것이 내게 허락된다면 그때에 가서 신에 대한 것을 쓰리라고 대체로나마 작정한 일이 있었습니다.”
-박두진(1958), 『시인의 고향』, p.209
1) 초기시 (1940년대) : 역사와 인류의 부조리에 대한 소극적 저항
(『청록집』(1946), 『해』(1949))
박두진이 시를 쓰기 시작했던 30년대 말은 일제 침략에 따른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의 암흑기였다. 따라서 그의 초기 시는 비관적이며 부정적인 현실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런 당대의 인식은 어둠ㆍ무덤ㆍ주검 등의 이미지로 상징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이런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항상 현실을 초극하려는 미래지향적 의지와 이상향적인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대의 정치 사회 현실에 대해 울분이나 저항을 직접 토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택한 우회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일제 말 이후 해방 무렵까지 지식인으로서 시대적 고뇌와 갈등, 정신적 방황을 오로지 시와 신앙으로 위로받으며 극복하려 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연을 통해 신의 섭리와 우주의 신비, 영원, 질서를 느끼며 모든 만물이 화해의 장으로 공존하는 세계를 기원했다.
北邙(북망)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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