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기독교사 감상문 아시아 에큐메니칼 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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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기독교사 감상문 아시아 에큐메니칼 운동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아시아기독교사 연구
아시아 에큐메니칼 운동사
작년 부산에서 에큐메니칼 신학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는 WCC 대회가 열렸었다. 그리고 나는 WCC 대회에 2주 동안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에큐메니칼 신학과 그 역사에 대해서 나름대로 알아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이난 코쉬의 는 내가 지금까지 읽어왔던 문헌들과 어떤 자료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에큐메니칼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좋아하는 명제는 아니지만 확실히 역사는 더 권력이 있고, 더 주류인 사람들에 의해서 쓰이고 읽혀진다. 에큐메니칼의 역사 또한 아시아 지역의 공헌은 삭제된 채 에딘버러 선교대회부터 설명되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또한 책을 읽고 난 뒤 그런 흐름 속의 논리에 지금까지 계속 젖어있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기독교가 북구(Northern) 즉 서양의 종교로 존재해 왔다는 가정이 있다. 나이난 코쉬, 아시아 에큐메니칼 운동사 I, 김동선, 정병준 역,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06, p.25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어떤 서양 종교의 확산이 아니라 그 기원과 초기 역사가 아시아적인 한 종교의 르네상스이다. 기독교의 기원이 아시아적인 것을 확인하는 것은 아시아 교회사와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Ibid, p.27
왜냐하면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있어야만 삭제되어져버린 아시아의 기독교사, 아시아의 에큐메니칼 운동사에 대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기독교가 비로소 꽃피운 것은 1400년이나 되어서였다. 반면 아시아의 기독교는 초기역사로부터 1000년 동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고 아시아에서 기독교가 갑작스럽게 사라진 것은 1500년경이었다. 때문에 아시아 기독교의 역사가 서양의 선교사와 동일시되어서 로마가톨릭은 16세기부터, 개신교는 19세기부터 시작된다는 관념은 매우 큰 착각일 수가 없다. 실제로 이러한 착각과 더불어 제국주의와 결합된 유럽 기독교는 아시아 선교에 실패하게 된다. 그들이 아시아 예수가 아니라 서양 예수를 전파하고, 아시아 문화적 그리스도가 아닌 유럽 문화적 그리스도를 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 실패가 아시아 기독교가 꽃피우지 못하는 역사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아시아인들은 아시아만의 기독교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아시아의 고난 받고 핍박받던 사회적 상황과 식민지 경험으로 인한 민족주의에 맞물려서 나타난 민중의 신음소리이자 부름이었고, 하나님의 나타남이자 선교였다.
아시아 에큐메니칼 운동사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높게 평가하는 부분은 서양 선교사 혹은 기독교를 매우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그들을 완전히 떼어버리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인도에서 온 아자리아의 연설에서 잘 나타난다. “다가올 모든 시대를 통틀어 인도 교회는 감사의 마음으로 선교사들의 영웅적이고 자신을 버린 노력을 입증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먹였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그러나] 우리 역시 사랑을 요구한다. 우리에게 친구를 주시오!” 나이난 코쉬, 아시아 에큐메니칼 운동사 Ⅱ, pp.46-47 재인용
아시아 기독교의 신학은 매우 역동적이었고, 매우 상황적이었다. 이미 체계화가 되어서 교리적인 서구 기독교와는 달리 아시아 기독교는 살아 있는 신학을 해야만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 경제, 정치적 어려움, 소망, 절망과 고난 등을 실체적으로 질문해야만 했다. 이러한 아시아 신학의 성격은 싱가포르에서 열린 CCA 5차 총회의 ‘정의와 봉사’ 보고서에 잘 나와있다. “장황하게 성명서를 발표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지금 우리는 행동의 시간을 살고 있다. 아시아인의 투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전체 해방과 충만한 사람을 위해 아시아인의 투쟁 속에 동참함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Ibid, p.67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