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나이난 코쉬의 아시아 에큐메니컬 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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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감상문 나이난 코쉬의 아시아 에큐메니컬 운동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나이난 코쉬의 아시아 에큐메니컬 운동사
저번 민중운동과 한국교회 시간에는 고진의 소설 내 안의 보루라는 소설책을 가지고 독서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이번에는 나이난 코쉬의 아시아 에큐메니컬 운동사라는 책을 가지고 독서보고를 하게 되어 매우 긴장 되었다. 확실히 소설책보다는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 또한 하나의 이야기를 풀어서 서술하는 것과, 신학적 지식의 한 부분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을 읽으려니 읽는 속도를 비롯해서 이해도가 굉장히 떨어져서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아시아 기독교사 연구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아시아의 기독교가 그렇게 발전했다면, 왜 지금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의문이 많이 풀리기도 한 것 같아서 기분 좋은 읽음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설명되어 있다고 느낀 것은, 에큐메니컬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고, 이러한 의미가 아시아에 처음 전달되었을 때, 그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전달이 되었기에 다시금 새로운 방향전환의 필요성이 있으며 그러한 방법들을 아시아의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에 대한 서술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내가 책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해서 이렇게 느끼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그러한 부분이 많이 느껴졌다.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반도 국가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여러 가지의 종교들이 혼합되어 있다. 그 중에 나는 개신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고, 또한 개신교라는 종교에 몸을 담그기 시작하려는 신학생이다. 어렸을 적에 성서공부 시간이나, 성경퀴즈대회 등 교회에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그림으로 보아도 항상 보았던 것은 서양에서 본 개신교의 시각이었다. 물론 어렸을 적에는 그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었고, 그냥 당연한 것이라는 인식으로 배워왔지만, 지금의 시선으로 보았을 적에는 나도 분명히 서양에서 들여온 기독교를 우리 한국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닌 그저 누구나 평범하게 보고 배우는 서양 개신교의 일부분이었다. 내가 보던 예수는 언제나 얼굴이 하얗고, 머리가 길고 약간 곱슬이 섞인 갈색 머리카락이었고, 그의 제자들 또한 예수와 마찬가지로 백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당시에 이스라엘이 유럽에 속해있는 국가인 줄 알았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부 백인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동심이 부셔지는 순간은 분명히 있었다. 아버지와 뉴스를 보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무수히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충격이었다. 또 뉴스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피부색깔이 전부 우리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진하거나 연했지, 절대 백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 사람들은 이스라엘에서 고용된 군인들일 뿐이고, 그 군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총과 칼로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중학생이 된 어느 날이었다. 친할머니 댁에 자주 가던 우리 가족은 그 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할머니 댁에 방문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교회에 다녀오시면서 이상한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액자를 하나 들고 오셨다. 동남아시아나 석유가 넘쳐나는 아라비아 반도계열의 사람얼굴이 그려진 액자였다. 나는 할머니께 여쭈어 보았다. 왜 그런 사람이 그려진 액자를 들고 오시냐고 말이다. 그런데 할머니가 대답해주신 그 대답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당시 할머니가 다니시는 교회는 감리교 쪽 교회였는데, 그 교회에서 이 그림이 아마 가장 예수와 가까운 얼굴일 것이라는 설명을 목사님이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림을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정말 엄청 큰 충격이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런 충격이었다. 내가 알던 예수와는 너무도 다른, 별로 위엄 있어 보이지도 않고, 고귀해 보이지도 않는 그저 그런 그냥 동남아시아의 아저씨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이 어디쯤인가 지구본을 꺼내들고 보았다. 유럽과 동남아시아, 인도 등의 사이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나라였다.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다. 이 지역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대체 무슨 피부색을 가지고 있냐고 말이다.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할머니가 보여주신 그 사람의 얼굴과 별로 차이가 없다는 말씀이었다. 물론 할머니께서 보여주신 그림이 진짜 예수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피부색이 그 사진과 같을 것이라는 것에는 아직도 나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올랐었다. 서구 기독교가 자신들을 위해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서구화 시켜놓았다고 말이다. 식민지 열강들과 함께 아시아에 온 것은 바로 유럽 상표가 붙은 기독교라고 말이다. 제국주의를 위해서 기독교를 유럽 포장지로 포장 해놓은 것이다. 우리는 여태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무분별하게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유럽은 식민지 지배를 통해서, 자유가 아닌 억압으로써 기독교를 전파했다. 십자군에 도취되어 있던 유럽은 아시아 사람들을 선교사를 통해서 회유했지만, 선교사들이 전하던 그 방식은 분명히 서구식이었고, 서구적인 배경과 서구적인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교리를 전했다. 그랬기에 아시아 사람들에게 반감을 샀던 것이다. 아직도 너무나도 많은 서구적인 기독교가, 유럽 옷을 입은 예수가 지천에 널려있었지만, 모든 것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아시아 에큐메니칼 운동이 여태까지 외쳐왔던 것은 아시아와 유럽, 아니 모든 이 지구의 사람들이 평등하게 마주보는 운동이었다. 내가 보기에 아시아 에큐메니칼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피어나는 한 줄기 꽃과 같았다. 아름다운 꽃이 아니다. 가시가 있는 꽃이 아니다. 그냥 이름 모를 야산에 피어나는 아주 억세고 억센 야생화 같은 느낌의 꽃이었다. 한 겨울의 모진 추위 속에도,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눈 속에서도 변함없이 피어나는 그런 이름 모를 꽃. 모진 비바람과 풍파 속에서도 흔들리지만 꺾이지는 않는 그런 꽃이었다. 물론 내가 너무 미화시켜서 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서구적인 기독교 사회에서, 인종차별이 존재하고 힘으로 억압하는 기독교 문화 속에서, 유럽과 아시아를 넘어 이 지구의 모든 것을 평등하게 바라보려고 나아가는 것. 비록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 발자국 씩 움직이는 거북이로 보일지 모르지만 앞으로 계속 나아가서 결국 토끼와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거북이처럼 나아가는 그런 것. 이 것이 에큐메니칼의 움직이는 흐름이지 않았을까 싶다. 에큐메니칼도 단점이 없는 무조건 좋은 그러한 것은 아닐 것이다. 100%의 확률이라는 것은 존재하기 힘든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점차 점진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조화시키고 있고, 기독교가 개발도상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지금 이 시대에서 너무나도 맞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부분이 있다. 2권의 ‘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아시아기독교협의회’에 있는 부분인데, 복사물이 밑에 쪽수가 복사가 안돼서 정확한 쪽수는 모르겠지만, 70p 초반 부분인 것 같다. 아우슈비츠의 집단수용소에서 교수형을 당하며 천천히 죽어가는 한 젊은이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한 포로가 질문했다. “지금 하나님은 어디 계시죠?” 그 질문에 뷔젤은 자신 안에서 어떤 소리를 들었다. “하나님은 교수대에 달려 계신다.” 라바옌은 계속해서 아시아의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빈민가에, 농장에, 그리고 근로자를 착취하는 공장에 계신다. 이 부분이 나에게는 굉장히 와 닿는 부분이었다. 굉장히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아시아의 고난은 대부분의 경우가 비기독교적이라고 말하는 이 사람이 이야기 해주는 이 부분에서 문든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예수처럼 살겠다는 우리들, 예수를 따라 걷겠다는 우리가 여태 무엇을 한 것일까. 우리 기독교가 아시아에서 얼마나 많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던 것일까. 우리는 앞으로 더욱 변해야만 한다. 민중을 위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억울한 자들을 위해서, 억눌린 자들을 위해서,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 소리 없이 죽어가는 자들을 위해서,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 진심으로 고백해야 한다. 이 책의 결론부분에서 말하는 것 같이 ‘제국이 되려는 의지’에 사로잡혀 갈 것이 아니라, 고백하며 나아가야 한다. 기독교가 개독교로 불리며 욕을 먹고, 목사들의 명예는 땅에 떨어져 신뢰 받지 못하는 이 시대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먼저 고백하고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두 번 다시 빛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우리의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예수에게서 등 돌려 버릴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지식적으로 부족하기에 많은 부분을 지식적으로 쓰지는 못하였지만, 아시아 기독교의 운동진행과 에큐메니칼의 운동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진 못했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진심으로 느끼려고 노력했다. 많은 반성과 후회가 겹치는 시간이었고, 깊은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계기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