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민중 신학, 세계 신학과 대화하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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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신학, 세계 신학과 대화하다.』를 읽고...
민중 신학은 한신대학교의 간판 신학으로 들어져 왔다. 그러므로 입학하고 지금까지 민중 신학에 대한 해석과 민중 신학에 주요 신학자들에 대해 자주 들어왔다. 나에게 민중 신학은 어려운 사람들, 빈민들을 위한 신학으로 그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세상을 향해 투쟁하는 신학이었다. 물론 나의 이런 이해가 민중 신학에 잘못된 이해는 아닌 것 같다. 다만 민중 신학의 단면만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민중 신학, 세계 신학과 대화하다.’라는 책을 읽고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민중 신학 입문기로 민중 신학을 이해하기에 아주 적합한 책이며 특히 한국에 민중 신학 만에 특성을 아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는 다른 우리만의 신학, 민중의 삶속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를 이 책을 통해 살펴 볼 수 있었다.
먼저 책의 저자 이정용의 그를 통해 민중 신학의 입문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가장 처음 민중이라는 말의 정의를 살펴 볼 수 있다. 민중이란 그냥 대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소수의 지배층에 의해 억압 받는 대중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민중을 정의하는 것은 하지 않는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정의라는 것이 사실을 제한하고, 생동감을 상실케하는 기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민중이란 어떤 정의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음으로 이정용은 억압받는 민중의 삶을 통해 그들의 한과 단에 대해 살피고 있다. 저자는 ‘한’은 민주의 경험이며 민중 신학은 ‘한의 신학’이라는 말을 통해 민중들의 억압을 말해주고 있다. ‘한’이란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일제강점을 통해서 우리나라 온 민족은 이미 ‘한’이 있다. 아리랑, 탈춤, 또는 당시 시대극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들의 ‘한’을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을 푸는 것으로 책에서는 ‘단’으로 말하고 있다. 단은 억압의 악순환을 끊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자기부정과, 사회적 차원에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것이다. 하지만 민중의 한을 푸는 일은 예수 사건(예수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한 해방)을 통해 성령의 운동을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다. 성령은 역사를 통해 현존하신다. 해방 투쟁의 원형은 한국에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통해 성령의 운동과 활동에서 현현되었다. 민중 신학에서 중요한 것은 민중과 민중의 ‘한’을 해방하기 위한 성령의 직접적인 활동이다. 또한 민중 신학에서는 어떠한 이론이나 개념들 보다 행동들을 더 중요시 여긴다. 역사 속에서 민중의 직접적인 투쟁이나 해방을 위한 행동은 그것이 기독교 안에서의 행동이 아니더라도 민중 신학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이것은 민중의 경험이며 문화이기 때문이다. 또한 민중은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힘을 길러 왔다. 민주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많은 소문들은 모이고 모여서 그들만의 문화가 되었고 그것이 바로 역사가 된 것이다. 민중은 경제적으로는 가난하고, 정치적으로는 억압당하며 사회적으로는 소외당했지만, 자신들의 문화와 역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민중이 바로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정용의 글을 통해 민중에 대해 민중 신학의 형성을 알게 되었고 그 속에서 민중의 힘을 보았다.
하지만 이정용은 민중 신학의 우려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이는 잘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충분히 범할 수 있는 오류들이다. 민중의 힘으로써 민중 신학은 비기독교적인 요소들을 포함한다. 이로 인해 새 종교를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며 또한 민중 신학자들은 성서의 권위를 민주의 경험에 종속시킴으로 민중의 경험을 옹호하기 위해 성서를 사용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지적한다. 민중 신학을 보다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민중에게 편파적인 것으로 보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내가 민중 신학을 이해하며 가장 신경 쓰였던 부분인데, 인간성을 신성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런 민중 신학의 과장된 인간의 지위는 우상 숭배와 같은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렇듯 여러 가지 우려들도 있지만 내가 이해한 민중 신학은 단순한 학문적인 신학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산물이며 억압받는 민중의 힘이 우리의 문화가 되었고 그들의 삶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민중 신학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면 민중 신학, 세계 신학과 대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조지 오글의 글을 통해 나는 많은 지식보다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노동자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 그의 동료들(조문걸목사, 조승혁 목사, 조화순 목사)과 함께 직접 민중들의 삶으로 들어갔다. 나는 처음엔 이 글을 읽으며 ‘어떻게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그 안에서 예수를 느꼈다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직접적인 투쟁이나 큰 사건을 일으킨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들은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전혀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 이것을 통해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를 보았다는 것은 너무 얼토당토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여기 힘들게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같았을 것이다. 갈릴리의 어부였고 나사렛의 목수였다.’는 조지 오글의 깨달음을 통해 느끼게 되었다. 내가 믿고 내가 따르는 예수님은 목수였다. 가장 기본적인 사실이지만 나는 지금까지 이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민중의 삶과 고난을 통해 그 속에서 예수를 발견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성서를 삶으로 가져오지 못한 채, 나는 항상 성서 속 위대한 인물 예수로만 생각해 왔다. 현시대에서 예수가 있다면 그것은 성전에 가자 높은 곳에 위치한 자도 아니고 세상에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도 아닐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인천 한 부둣가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의 모습일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 신학과 삶을 분리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억압 박는 민중, 항상 모멸감에 살아가는 민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 만에 힘이 있었다. 그들 만에 힘이 바로 문화이다. 민중은 언제나 자신들의 고난 속에서 예수의 고난을 체험했다. 그것이 민중 신학이 십자가의 신학인 이유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역사적 객체에서 해방시켜 역사적 주체의 자리에 서게 한다.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 또한 우리는 역사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 아니라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역사 속에서 움직이는 ‘힘’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민중의 힘인 문화적인 차원에서 보는 샤머니즘은 내가 지금까지 이해했던 무속신앙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샤머니즘은 소외된 집단들을 위한 신앙으로 이해되는데,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한마디로 그들에겐 희망을 주는 것이다. 또한 샤머니즘은 현실에서 비교적 더 힘없고 억압받는 여성 위주의 신앙인 것이다. 항상 억압받는 그들이 자신들 만에 신앙을 만든 것이 바로 샤머니즘 인 것이다. 민중 신학은 한의 신학이라는 것처럼 샤머니즘은 그들의 한을 푸는 그들만의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이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고, 기독교적으론 우상숭배의 기능을 하는 것은 사실이기에 우리가 무조건으로 샤머니즘을 숭배하는 것은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샤머니즘을 종교가 아닌 우리 민중들의 문화볼 때 그 자치와 의미가 더 잘 이해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민중의 문화란 무엇일까? 과연 억압된 자에게 문화를 창조하고 이끌 자유가 있을까? 그러나 책에서 민중은 억압받는 현실 속에서 그들의 문화를 창조한다고 하고 있다. 우리의 민속적인 음악, 춤, 연극, 설화 등은 모두 우리의 문화이다. 나는 봉산탈춤이 떠올랐다. 내가 흔히 알고 있는 탈춤은 모두 민중이 만들고 민중이 행했던 문화인 것이다. 역사의 주체인, 그러나 억압의 대상인 민중은 자연과의 공감으로부터 삶의 희망과 힘을 얻고, 그들처럼 불의를 겪고 있는 사람들과 공감을 통해 도덕적 힘을 보여준다. 이러한 민중문화는 내면화된 문화로써 비참함과 무력함 속에서 사람들이 인간이 되기 위해 어떻게 애쓰는가를 밝히면서 드러낸다. 민중들이 창조해낸 문화는 그들의 한풀이였고, 그들의 희망이었다.
민중을 이해할 때 책에서는 민중이라는 말이 신학에 적용되면 복잡성은 더해진다고 나타낸다. 한마디로 민중은 고정된 형식을 초월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며 역동적이고 변화하는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민중에 대해 알아가는데 필요한 것 같다. 또한 민중의 한은 체념으로 이끌지도 모르며, 의례적인 춤이나, 유머나 이야기로 한풀이를 찾을지도 모르고 혁명이나 집단적 행동으로 이끌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반응은 집단적 자기정체성, 기억, 의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거론하지 못하는 신학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으로 민중의 삶을 훌륭하게 분석한다 할지라도, 언제나 추상적이고 민중의 실제적인 삶과 무관한 것이 된다. 민중은 문화를 통해 스스로 역사의 주체가 된다. 그들의 실체가 역사 속에서 끈질지게 남아 있으며 위기와 변혁을 거치면서도 그 지속성을 잃지 않으면서 역사의 기억을 간직하고, 또 그로 인해 역사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문희석에 따르면 민중은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 억압된 자들은 주로 생존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자신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따라서 타인의 주인이 아니라 창조의 주인이 되어서, 자신의 해방에 참여해야 할 본래적 권한을 일깨워 줄 예언자적 임무가 있다고 책에서는 말하고 있다. 민중 스스로가 역사적 주체가 되기 위해선 그들만의 기억과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서, “ 악용과 억압의 대상이 되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그들만의 기억과 이야기를 만들어 갈 때, 그들은 실제적인 역사의 주체가 된다. 역사 속에서 민중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민중이란 고정된 어떤 객체가 아닌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역사를 보면 그 속에 민중이 없는 경우는 없다. 언제나 민중은 역사 속에서 그들만의 소리를 내며, 그들만의 한을 풀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한국 역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든 그 속에 민중 없이는 그 사회를 유지하는 것도, 혁명도, 변화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역사성은 그리스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