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역사를 살다

 1  독후감 역사를 살다-1
 2  독후감 역사를 살다-2
 3  독후감 역사를 살다-3
 4  독후감 역사를 살다-4
 5  독후감 역사를 살다-5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독후감 역사를 살다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역사를 살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은 한 사람의 정체성은 물론 특정 집단의 정체성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 한다. 본 책 “역사를 살다”는 내가 속한 한신과 기장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한 어디로 가야할 지를 말하고 있다.
저자는 절대 긍정을 위한 부정이라는 머리말에서 한국교회 150년의 역사 속에 기장의 60년 세월과 한신의 70년 세월을 말하며, 우리에게 당신은 기장과 한신의 정체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물으며 이것은 신앙고백과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은 크게 세 주제로 나누어 설명되고 있다. 1,2부에서는 한신과 기장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 3부에서는 어디로 가야할 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제 1부는 새 시대를 꿈꾸는 창조적 소수자라는 제목 아래 장로회 내에서 기장이 어떻게 분립되었는지, 그 가운데 조선신학교의 설립과 그 배후 주역들의 삶과 활동상을 논구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은 미완의 해방이었다. 자주적인 민주 국가로서의 해방이 아닌 미, 소에 의한 신탁통치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 의해 교회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남한과 북한의 교회는 각자의 사정에 맞게 교회 재건에 서둘렀다. 남한의 경우 1945년 9월 새문안교회에서 대회를 열었으나 감리교를 선두로 한 각 교파가 교파 환원을 선언하였고 이에 따라 장로교도 1946년 6월 승동교회에서 남부 총회로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로교의 교회 재건운동은 평양신학교의 폐교와 맞물린 조선신학교의 개교, 그리고 북한에서 종교 자유란 이름으로 남한으로 내려온 지도자들과 본국으로 귀환하였다가 돌아온 외국 선교사들로 인해 논란이 야기되었다.
해방 후 조선신학교는 남부 총회의 결의에 따라 장로교의 미래에 대한 합리적인 방법을 강구하였으나 선교 초기부터 식민주의적 선교정책을 취했던 미국의 장로교 선교부는 이를 거절하였다. 일차적으로는 신학에 관한 문제였으나 본질적으로는 한국 내에서 자신들의 보수적 교권을 위한 움직임이었다.
또한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후 조선신학교로 편입된 51명 재학생이 조선신학교의 가르침이 장로교회의 정통 신학 노선에 맞지 않는다는 항의 서한을 총회에 보내고 이에 대해 총회가 조사 하는 과정에서 보수 교권주의자들이 일방적으로 조선신학교의 신학 교육을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규정하면서 문제가 심화되었지만, 총회 진상조사위원회는 몇 번의 조사 끝에 조선신학교의 신학이 결코 성서의 권위를 파괴하거나 장로교 신앙고백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결국 신학의 자유를 주장하던 측과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매도하던 측의 갈등은 1952년 37회 총회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37회 총회의 결의안은 총회 신학교로써의 조선신학교를 부정하고 김재준 목사의 제명, 성경 축자영감설을 부정한 스코트 목사 심사 및 처단, 위의 두 목사에 대한 옹호, 지지, 선전을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불법적 결의안에 대해 김재준 목사는 카인과 아벨을 비유하여 통탄하였고 신학적으로나 헌법적으로 부당함을 항의하는 여러 단체의 반발이 일어났지만 총회가 이를 무시함으로 장로교는 분열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 끝에 기장은 1953년 6월 10일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호헌파의 법통 제 38회 총회를 열게 된다. 새로운 총회는 기장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새 역사 운동’이라는 개념 아래 한국 교회의 보수적, 교권적인 선교사를 의존하는 성격을 개혁하고 한국 교회의 자주적이며 주체적인 성격을 계승하려 하였다. 또한 세계 교회와의 교류를 통해 선교 지평을 확대하고, “전적인 그리스도를 인간 생활의 전 부분에 증거하는” 역사 참여를 통해 민족 현실 속에 선교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을 다짐하였다. 실질적인 교단의 제도 혁신의 방향으로 지교회는 선교를 맡고 노회는 교회 개척을, 그리고 총회는 정책 수립을 맡았다. 그리고 세계 교회와의 협력 관계 또한 우선적으로 해외 교회로부터 지원받는 선교비 청구를 거부하였다. 이는 의존 사상을 배격하고 자조 자립정신을 함양하겠다는 뜻이었다. 둘째로, 세계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59년 한국기독교연합회에 정식 가입하고 1960년에 세계 교회협의회에 가입하였다.
기장은 4.19혁명을 기점으로 세계 교회의 해방 전통을 우리나라 역사 현실에 실질적으로 접목시켜 역사 현실에 대해 눈 뜨게 되었고 이는 이후 일어나게 되는 독재 속에서 예언자적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데에 시발점이 되었으며 이것은 사회 선교로서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이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