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초기시 비평

 1  1920년대 초기시 비평-1
 2  1920년대 초기시 비평-2
 3  1920년대 초기시 비평-3
 4  1920년대 초기시 비평-4
 5  1920년대 초기시 비평-5
 6  1920년대 초기시 비평-6
 7  1920년대 초기시 비평-7
 8  1920년대 초기시 비평-8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 레포트 > 독후감
  • 2015.03.29
  • 8페이지 / hwp
  • 1,100원
  • 33원 (구매자료 3% 적립)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1920년대 초기시 비평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920년대 초기시 비평
-차 례-
1 1920년대의 시대상황과 민요시 태동
2. 김억의 격조시론
3. 주요한, 자유시에서 민요시로- 「노래를 지으시려는 이에게」를 중심으로
4. 김소월, 민요시의 승화와 극복-시혼을 중심으로
5. 맺음말
1. 1920년대 시대상황과 민요시의 태동
1920년대는 신시 운동이나 개화기 시가의 설교조 계몽주의가 비로소 극복되는 단계를 볼 수 있는 시기이다. 문예 사조 측면에서, 백대진은 말라르메 중심의 지적 상징주의를 김억은 베를렌, 구르몽, 시몬스 같은 감성적 상징주의를 소개함으로써 우리 시가 서구의 상징주의와 접촉을 갖기 시작하였다. 한계전, 『한국 현대 시론 연구 일지사』,1983. 16-18면.
안서의 상징주의가 백대진보다 우리 근대시에 더욱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이유는 첫째. ‘감성적 상징주의’ 여기서 감상적 상징주의의 개념은 낭만주의로서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후기 낭만주의 즉 상징주의 특징인 음악적 감각적 표현의 현대시 기법 개념의 혼용으로 보인다.
가 ‘지적 상징주의’의보다 한국 독자들에게 보다 더 쉽게 이해 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근대 사조에 어두웠던 우리의 문화 풍토에서 상징주의의 출현은 새것에 대한 호기심을 일으키고도 남을 일이었다는 점이 그 두 번째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백대진의 경우에는 상징주의에 대한 이론 소개 외에 시역작업이나 시 창작을 하지 않았음에 반해, 안서는 시역이나 시 창작의 수준이 그의 상징주의 이론 소개의 그것보다 훨씬 높았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하겠다. 2) 한계전·홍정선·윤여탁신·범순 외,『한국 현대시론사 연구』,문학과 지성사, 1998, 47면.
안서는 상징주의 시론으로부터 운율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자유시론을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정치적으로는 일제하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 민족 문화의 정통성을 모색한 시기이다. 서구지향의 자유시의 범람과 3·1운동을 계기로 체득된 신 민족주의 사관은 당시의 문단에 우리의 전통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자각을 일깨웠으며, 조선어의 존중, 고유한 향토어, 조선의 독창적 시형의 모색 등을 추구하게 했다. 이는 김억·주요한·김소월·홍사용·김동환등 서로 다른 동인을 형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는 민요 지향성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문학 이념을 가지게 되었다. 3) 오세영, 『한국 낭만주의시 연구』, 일지사, 1980, 30면.
20년대 중반부터 일기 시작했던 전통 문화 탐구열의 문학적 반영이 민요시로 나타났으리라는 견해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구 지향적인 자유시 운동에 대한 반성과 우리 민족의 정서에 걸맞는 시형을 모색하려는 주체성 정립의 한 과정으로 이해된다 한계전·홍정선·윤여탁·신범순 외, 위의 책, 83면
그러나 민요시의 태동은 김동환의 민요시론이 표방하고 있듯이 KAFE 의 계급주의 문학에 대항하기위해 ‘민족주의라는 것은 계급주의 문학의 대립의식에서 출발’ 김윤식, 『한국 근대 문예 비평사』, 일지사, 1976, 107면
이라는 사상사적 구도도 무시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민요시연구에서 김동환을 연구할 때 이 계급적 이데올로기의 정서면이 다루어지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주요한과 김소월을 중심으로 민요시의 전개와 특징을 살펴볼 계획임으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였다.
‘민요시’, ‘민요적 서정시’ 처음 민요시라는 용어의 사용은 김억이 1922년 개벽 25호에 처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후에 ‘민요시’와 ‘민요조 서정시’라는 용어는 오세영과 김용직에 의해 각각 사용되었다. 이 두 용어에 대해서는 오세영, 위의책, 38-40면, 김용직,『한국 근대시사』, 학연사, 1986, 305-308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