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 속의 천주교회와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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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박해 속의 천주교회와 발전
1.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과 초기 박해
1) 박해의 시작
박해의 시작이라고 보기 보다, 처음으로 시련의 계기가 된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가성직 제도의 부당함을 알게 된 조선 천주교회는 윤유일이 1790년 9월의 두 번째로 구베아 주교를 대면하게 된다. 구베아 주교로부터 신부 파견을 약속 받고 몇가지 조선 천주교의 질문들의 대한 답을 얻어가지고 가게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조상숭배에 관한 문제이다. 프란체스코회 소속이었던 구베아 주교는 조상제사를 금하는 천주교회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바로 이 점이 조선 천주교회가 처음으로 맞을 시련의 계기가 되었다. 조상제사를 금한다는 교회의 입장이 전해지자 아직은 유교적 전통이 강했던 상당수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이것은 조상숭배를 효(孝)의 근본으로 삼고 있던 전통에서 천주교가 배척받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되는 것이다.
유교적 전통에 익숙해 있던 조선사회에 서학이 이단자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안으로는 유교적 인습을 포기하지 못한 양반 계층 교인들이 이탈하고 밖으로부터는 벽위, 척사 세력의 공격을 받는 시련이 이때부터 찾아오기 시작한다.
2) 을사추조적발 사건과 진산사건
◇ 을사추조적발사건 : 1785년(정조 9년)
형조의 금리들이 우연히 명례방 현재의 명동
김범우의 집을 지나다가 이상한 모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이 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 권일신 권상학 부자등이 모여서 천주교 교리를 읽고 있던 중, 금리들은 그들이 노름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들어왔다가 천주교 서적과 화상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압수하여 형조에 갔다 바쳤다. 당시 형조판서 김화진은 집주인인 중인(中人) 김범우만 체포하고 나머지 양반계층 교인들은 책유(責諭)하여 내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이것이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천주교인의 실체가 정부 기관에 의해 최초로 발각된 사건이다. 김범우는 단양에 유배당한 후 1년만에 유배지에서 죽음으로 “조선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1785년 3월에 태학생(太學生) 이용서, 정숙등이 사학을 엄하게 배척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통문을 내었다. 이것이 유림에서 나온 최초의 천주교 배격문이다.
홍낙안, 유하원, 이경명등이 정조에게 서학의 사설을 금하지 않으면 점차 백성들에게 퍼져 무군멸친하는 폐단이 발생하니 우선 서학관계 서적을 불살라 없애는 것이 시급하다고 계속 상소를 하여 정조는 마침내 그 상소를 받아들여 집안에 모든 서학 관련 서학서들을 모두 불에 불태어 버리거나 물에 던져버리고 북경으로부터의 서학서 수입을 엄중 단속하라는 명을 내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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