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회사] 기해 박해와 정하상의 상재상서의 정치 사회사적 의미

 1  [천주교회사] 기해 박해와 정하상의 상재상서의 정치 사회사적 의미-1
 2  [천주교회사] 기해 박해와 정하상의 상재상서의 정치 사회사적 의미-2
 3  [천주교회사] 기해 박해와 정하상의 상재상서의 정치 사회사적 의미-3
 4  [천주교회사] 기해 박해와 정하상의 상재상서의 정치 사회사적 의미-4
 5  [천주교회사] 기해 박해와 정하상의 상재상서의 정치 사회사적 의미-5
 6  [천주교회사] 기해 박해와 정하상의 상재상서의 정치 사회사적 의미-6
 7  [천주교회사] 기해 박해와 정하상의 상재상서의 정치 사회사적 의미-7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천주교회사] 기해 박해와 정하상의 상재상서의 정치 사회사적 의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기해 박해와 정하상의 상재상서의 정치 사회사적 의미
1801년 황사영 백서사건은 당시 조선정부가 천주교를 반윤리적 사상이며 외세와 직접 거래하는 반역집단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이 점은 위정자들에게 백성들로부터 정치권력의 유지에서 국민적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는 합법적인 근거가 되었다. 1839년 국민의 공감대를 얻었다고 생각한 조선정부가 천주교에 대한 무부 부군의 윤리와 외세를 이용한 역적 음모집단으로 몰아가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사건이 천주교 대규모 박해사건인 기해박해이다. 이 큰 박해는 안동김씨에서 풍양조씨로 권력이 이양되는 과정에 일어났으므로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단순한 탄압으로만 볼 수 없지 않는가? 하는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동안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박해는 국민들에게 명분이 되었고 이번에도 그같은 명분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 실세 풍양조씨의 주도하에 국민에게 선포한 것이 척사윤음이다. 척사윤음의 목적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근거를 국민에게 명문화시키고 국민으로부터 공감대를 얻어 그 정당성을 확보하겠다는 데 있었다. 이런 의도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에 박차를 가해가는 당시 조선정부측에서 와중에 돌발변수를 만날 줄 전혀 예측못한 것이 있다. 그것이 정하상의 상재상서이다. 정하상의 상재상서란 재상에게 올리는 글이다. 이 상재상서의 전후 맥락과 상재상서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기해박해
헌종 5년 1839년 3월 5일 전의를 거느리고 문안차 입궐한 우의정 이지연은 대왕대비 김씨와 천주교인의 무부무군, 역적, 관례의 비방과 중상 등에 관하여 대화를 나눈 후에 좌우포장에게 철저한 사찰을 명하는 한편 형조판서에게 개정을 명하고 오가작통법으로 지방을 다스릴 것 등의 구체적 천주교 근절방안을 마련하였고 대왕대비가 즉시 시행토록 명하였다. 최석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서울: 한국천주교사 연구소, 1982, 134.
1839년(헌종 5년) 4월 18일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이 공식 반포됐고, 이로써 시작된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전국적으로 확산, 1840년대 말까지 계속됐다. 최선혜, 기해박해 순교 성인의 생애와 활동,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wind5696/150047274626
10여세에 불과한 어린 헌종의 조모 순원 왕후 안동김씨 대왕대비 23대 순조실록, 1789-1857,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창조 영안 부원군 김조순의 딸이다. 1802년 10월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아버지 김조순과 오라비 김유근으로 이어지는 안동김씨의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순조와의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으며 1857년 창덕궁에서 죽었다. 그 아들 효명세자는 1812년 순조 12년에 세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조만영의 딸을 맞아 가례를 올렸다. 신정왕후 풍양조씨는 익종비가 된다. 1827년 부왕의 명을 받아 대리 청정한지 4년 만에 22세 나이로 죽었다. 이 때에 그의 외척인 풍양조씨가 대거 등용되어 안동김씨와 정치적 세력투쟁을 벌이게 된다. 그 아들 헌종이 그 뒤를 잇게 된다.
는 오라버니 황산 김유근의 보필을 받아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으나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김유근이 몸이 쇠약하여 정계에서 은퇴하게 됨과 동시에 정권은 풍양조씨 세도 하에 천주교에 적대적인 우의정 이지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최석우, opcit., 135.
. 개인적으로는 천주교에 적대적이 아닌 대왕대비는 기해년에 유력한 일파의 세력인 풍양조씨에 눌려 자신의 이름으로 선포된 결국 박해 령에 수결하게 되었다. 헌종 5년 기해년 2월 신정왕후 풍양조씨의 부원군 조만영의 아우 조인영이 이조판서로 임명되어 관리를 채용하는 권력을 잡게 되고 조인영의 조카뻘인 조병현이 형조판서가 되어 모든 죄인을 처벌하는 권력을 잡게 되었고 조인영의 장남 조병구가 홍문관 제학에 이어 4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유홍렬, 한국천주교회사, 서울: 카톨릭 출판사, 1962, 326.
교회 내부에는 김순성이란 밀고자에 의해 포도청에 가장 정확하고 상세한 정보가 제공되므로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있던 현석문(가롤로), 조신철(가롤로), 정하상(바오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등 조선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며칠 사이로 속속 체포됐다. 같은 시기에 김순성은 포졸을 이끌고 수리산(현 경기도 안양)에 가 최양업 신부의 부모인 최경환(프란치스코)ㆍ이성례(마리아) 등을 체포했다. 김순성은 온갖 계략을 이용해 앵베르 주교 거처에 대해 정보를 수집했고, 결국 앵베르 주교는 8월 10일 포졸 앞에 자수하였다. 앵베르 주교의 자수는 조정을 매우 놀라게 했다. 조정에서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체포할 것을 지시했고 교우들에게 피해가 더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앵베르주교의 두 신부에게 보낸 자수 권고의 쪽지를 받은 두 신부가 9월 6일 충청도에서 자수하고 서울로 압송됐다. 의금부에 설치된 국청에서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 유진길, 정하상 등 주요 인물들이 차례로 심문을 받았으며 9월 21일 3명의 선교사의 군문효수형으로 새남터에서 순교에 뒤이어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남이관, 김제준(김대건 신부 부친) 등이 처형을 당하였으며 훗날 기해박해 순교자 중 1984년 5월 6일에 시성돼 성인품에 오른 사람이 70명이나 되었다. 최선혜, opcit.
2. 척사윤음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