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연구 주요 저작 강독 -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2 - 해방후 편(1945-53)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 남한 공산주의, 한국전쟁, 박헌영파의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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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연구 주요 저작 강독 -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2 - 해방후 편(1945-53)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 남한 공산주의, 한국전쟁, 박헌영파의 숙청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2
- 해방후 편(1945-53)
스칼라피노이정식 공저
1. 주요 내용 및 논지 요약
◆미군정과의 갈등으로 분열.대립 거듭한 남한 공산주의
본 저서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 발표에서 시작한다. 일본의 정무총감 엔도 류우사쿠는 서울에 있는 민족주의자 3명, 여운형, 안재홍, 송진우를 불러 치안유지의 책임을 맡긴다. 이들은 조금씩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었는데 여운형은 강경한 민족주의자로 분류된다. 저자들은 그를 한국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긴밀한 협조를 이어왔지만 그들 기관의 중앙에는 설 수 없었던 좌익 민족주의자라고 설명한다.
송진우는 가장 온건한 인물이며 안재홍은 이 둘의 가운데 지점에 위치한다. 송진우는 중경에 있던 한국임시정부가 빨리 자리잡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므로 일본의 제안을 거부했고 그 결과 해방 이후 한국인의 최초의 정치적 움직임은 여운형과 안재홍이 주도하게 된다.
이들은 같은해 8월 15일 서울에 본부를 둔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다음잘 국민 전체를 상대로 한 중요 연설을 통해 건준 결성 사실을 발표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나 망명지도자들보다 정치무대에서 우선권을 잡은 셈이다.
건준의 주요 보직은 여운형과 안재홍을 비롯해 최근우, 정백, 권태석 등 좌익적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차지했다. 안재홍은 조직 내부의 뚜렷한 좌익적 경향을 우려하며 9월 1일 사임했다.
같은달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55명의 중앙인민위원을 선출하고 정부를 수립하면서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이 수립된다. 인공은 이승만을 주석으로 선출하고 부주석에 여운형을 뽑는 등 표면적으로 우익과의 안배를 고려했다. 중앙인민위원 55인 가운데 39인이 공상당원이라는 점에서 좌익의 우위는 여전했다.
일본 통치질서가 갑작스레 붕괴했다는 점, 한국 사회의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식량문제, 가뭄 등은 좌익세력이 우선권을 잡는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여기에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의 대부분이 일본과의 협력으로 설자리가 없었다는 점에서 좌익 지식인들은 공개적인 동경을 받았다. 한때 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위험한 일이었지만 해방 이후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심리적인 만족을 주는 행위가 된 것이다. 하지만 공산주의, 민주주의적 사회주의, 자유민주주의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드물었다는 점 역시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시기 한국에서는 소련의 존재가 주목을 받는다. 일본이 세력다툼으로 완전히 제거된 상황에서 소련은 2차대전을 통해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미국은 지리적인 거리가 단점으로 작용했다. 소련세력과 제휴한 정치운동이 힘을 얻게된 셈이다. 여기에 당시 한국인들이 소련을 연합국의 일원으로 보고 미국과의 불화 가능성을 예견하지 못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서울 중심가에 공산당 간판을 처음 건 것은 장안파였지만 박헌영이 등장하면서 분열양상을 띄게 된다. 박헌영은 8월 19일 성명을 통해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공산주의 노선을 최초로 분명히 밝혔다. 공산주의자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국내에서 공개적인 첫 행보에 나선 것이다. 장안파와 박헌영의 재건파는 파벌양상을 보였으나 같은달 22일 투표에서 재건파가 승리했다.
9월 9일 미국 점령군이 한국에 도착한다. 하지 중장과 참모들은 같은달 12일 각 정치집단 대표 1200명을 만난 자리에서 단 한개의 당이나 단체를 승인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고 인공과 점령군 당국 사이에는 반목이 시작됐다. 미 군정은 인공을 공산당이 조종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박헌영파는 9월 11일 기관지 해방일보를 통해 4항목의 강령을 발표한다. 10월 장안파가 소련의 승인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재건파와의 파벌투쟁이 벌어진다. 10월 13일 평양에서 북조선 5도당원 및 열성자 연합대회에서는 장안파인 이영 등에 대한 맹렬한 비판이 이어졌다. 북조선분국의 창설이 결정된 이 회의에서는 곳곳에서 박헌영이 조공 수뇌로서 인정받았음이 확인된다는 점, 그리고 김일성이 10월 14일에나 공식적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결국 장안파는 11월 24일 해체를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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