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연구 주요 저작 강독 -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2(제4~6장) - 미 군정기의 한국 공산주의, 소련 후견 하의 북한 공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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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한연구 주요 저작 강독 -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2(제4~6장) - 미 군정기의 한국 공산주의, 소련 후견 하의 북한 공산주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2
① 강독한 저작의 주요 내용 및 논지 요약
제 4 장 미 군정기의 한국 공산주의
일본이 패망 후 국내 치안유지의 책임을 당시 정치적 경험이 풍부하고 명망이 높았던 여운형, 안재홍, 송진우 이 세 사람에게 맡게 된다. 이 중 강경한 민족주의자였던 여운형은 공산주의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좌익편에 서 있던 사람이었으나, 미군정과도 유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이 책에서는 여운형을 좌우, 어떠한 고정된 정치노선을 추구할 수 없었던 인물로 공산주의에는 크게 고무되었으나 결코 그들 기관의 중앙에는 설수 없었던 혁신적인 좌익 민족주의자로 언급하고 있다. 이는 여운형 뿐만 아니라 당시 급진적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를 구별하는 것이 각 개인별 상황이나 다양한 관계들에 의해 어느 하나로 규정짓기가 매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1. 조선인민공화국의 출현 ∼ 2. 남한에서의 공산당의 출현
1945년 8월 16일 여운형과 안재홍이 중심이 되어 발족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는 아직 수많은 망명지도자들이 해외에 있는 시점에서 국내 정치무대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특히 탁월한 좌익운동가의 대다수가 머물러 있었던 서울의 건준은 급속히 좌익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렇게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된 이유는 내부적으로 당시 해방이 전적으로 외부적인 힘의 산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좌익이 안출해낸 것처럼 분위기가 조성된 것과 기존 주요 인물들이 일제의 협력자로 낙인찍히게 되면서 그들을 대신해 좌익혁명가들이 동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시는 소위 지식층 내에서조차 공산주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었던 상황으로, 이 시기의 한국정치를 다른 나라의 문화나 인텔리겐챠가 갖는 시각과 관점에 입각하여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외부상황을 살펴보면 통찰력있는 한국인들은 2차 대전을 통해 강대국으로 부상한 소련이 조국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며, 따라서 소련세력과 제휴한 정치운동은 당연히 성공하리라 인식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당시 모든 한국인들이 소련을 연합국의 일원으로 보았다는 것으로, 당시 이데올로기나 국제정치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정치적 지향을 가진 한국인들은 당연히 힘이 있는 소련과 또한 그와 관련된 좌익에 기대를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건준이 정부형태로 바뀌어 감과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은 통일전선 뿐 아니라 독자적인 활동에도 힘을 기울여 서울 중심가 장안빌딩에 ‘조선공산당 서울시당부’라는 간판이 걸리며 ‘장안파’라 불리던 조직이 결성되지만, 곧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한 박헌영이 전면이 나타나면서 그 입지가 좁아지게 된다. ‘재건파’라 불리던 이들은 2단계 혁명의 필요성을 전적으로 옹호하며 ‘신민주주의적 혁명’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따라서 1단계인 ‘광범한 민주주의적 인민전선(人民戰線)’을 만들기 위한 ‘부르조아’ 혁명을 위한 그들의 공개적인 활동이 역사상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나, 그 시작은 ‘분파주의’로 인해 힘을 모으지 못했다. 이에 재건파는 장안파의 해체를 요구했고 결국 투표를 통해 승리를 거두게 된다.
3. 미국의 초기 정책과 한국의 좌익
9월 9일 미 하지(J.R.Hodge)준장이 한국에 도착했고, 9월 12일 모든 정치집단들의 대표가 참석하는 회의를 요청하게 된다. 1,200명이 참석한 회의에서 하지는 한국의 정부로서 어떤 한 개의 당이나 단체를 승인할 의사가 조금도 없음을 명백히 밝히면서 소위 인공과 점령군당국 사이의 반목이 시작된다. 이는 미국이 이미 인공이 공산당이 조종하는 좌익운동의 일부임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당시 치안까지 완전히 장악한 인공과 주한미군 사이의 파국은 이미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4. 공산당의 강령 ∼ 5. 파벌투쟁 ∼ 6. 당과 외곽단체의 강화 ∼ 7. 경쟁적 합작공세
9월 11일 박헌영파는 통합 조선공산당의 결성과 함께 4항목의 강령을 발표하며, 인공이 유일한 합법적 정부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당시 소련이 새로운 조선공산당의 입장을 완전히 승인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는 당시 소비에트 당국의 직접 통제 하에 있던 평양의 현준혁파(조공 평남지구 확대위원회)가 과거 조공의 정책적 입장을 신랄히 비판한 데서 알 수 있으며, 또한 남한은 이미 미국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상이한 정치적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은 계속해서 그들의 정책을 인편, 라디오방송, 간행물 등을 통해 지시하며 영향력을 남북 모두에게 미치고 있었다.
초기 서울의 장안파와 재건파간의 파벌투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특히 장안파는 소련의 승인을 얻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는데, 10월 이영과 최익한이 소련의 승인을 탄원하고 소련 최고당국으로부터 당의 노선을 알아내기 위해 평양을 다녀와 ‘정권수립과 민족통일전선에 관한 결정’을 새로 발표하기도 하였으나, 조급함으로인해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시키지는 못했다. 10월 북조선 5도 당원 및 열성자 연합대회가 평양에서 열리게 되는데 이미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의 수뇌로서 인정을 받으며 당시 회의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통렬히 비판을 받아 결국 이후 장안파는 급속히 우익측으로 기울어져 송진우의 한민당, 안재홍의 국민당과 함께 3당 연합을 통해 국민대회준비회를 발족시키기까지 했으며, 11월 24일 결국 공개적으로 장안파는 해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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