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북한 정치변동 -김일성 권력독점체계 확립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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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북한 정치변동 -김일성 권력독점체계 확립을 중심으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950년대(1953~1958) 북한의 정치변동
-김일성 권력독점체계 확립을 중심으로-
목 차
1.
서 론
2.
1953년의 정치적 변화와 남로당계의 종말
3.
김일성의 권력독점을 향한 첫걸음(1955년 8월~1956년 2월)
4.
반 김일성세력의 공개적도전과 김일성계의 승리(1956년 3월~ 1958년)
5.
1950년대의 정치변동과 김일성계의 권력독점의 의미
6.
결 론
1. 서 론
한국전쟁이 끝나는 1953년에서 1950년대 말까지의 기간은 북한의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의 기간이 북한사회주의의 기초를 닦는 시기였다고 한다면 이 기간은 북한사회주의 체계의 성격을 규정하는 김일성 일인중심의 정치구조가 틀을 잡은 시기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196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 작동된 북한의 특정한 정치구조의 기반은 바로 1950년대에 김일성계의 권력독점에 의해 이미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북한의 전주석인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러한 구조가 그대로 북한사회주의의 운영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사회주의의 이행과정에서 형성된 정치구조는 그 시대의 정치경제적, 국내국제적 요인 등 여러 가지 역학관계의 변화에 따라 실제와는 다른 구조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었으며, 그 중에서 1950년대는 이러한 가능성이 현실에 가장 근접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2. 1953년의 정치적 변화와 남로당계의 종말
6.25 한국전쟁은 북한을 초토화시켰다. 전쟁은 김일성 정권에게는 커다란 재앙이었다. 소련과 중국의 지지를 토대로 김일성 정권이 주도한 6.25전쟁은 ‘조국해방’을 이루는데 실패함은 물론 북한전역을 파멸 직전으로 몰고 갔다. 1953년의 공업 총생산액은 1949년 수준의 36%로 떨어졌으며 8700개 이상의 공장과 기업이 파괴되었다 국민소득은 1949년의 69%로 농업총생산액은 76%로 추락했으며 최소한 1백만의 사상의 손실을 입었다. 북한전역에서 인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질환이 퍼져나갔고 자살기도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 실패의 일차적 책임은 당, 정, 군의 최고지도자 김일성의 몫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의 지도력은 일단 도전받게 될 가능성이 있었으며 그러한 도전은 정치적으로 정당성을 띠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의 원인과 배경에 대한 수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수백만의 사상자를 가져온 한국전쟁에 대해 당시의 남북한의 정권과 지도자는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미제국주의에 대한 승리’라는 북한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거의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있었다. 이질적 파벌간의 잠정적 합의에 의해 유지되어온 북한정치권력의 취약성은 이런 조건하에서 권력투쟁의 길을 열어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의 실패는 군사적 영역에서 두드러진 장악력을 보인 만주 빨찌산 계열의 힘의 약화를 의미하기도 했고 김일성의 정치적 판단에 대한 회의를 가능하게 하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제까지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남로당계, 연안계, 소련계로부터의 도전 및 저항의 조건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만주계의 세력이 가장 세차게 도전 받았고 오늘날 북한에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정권과 체제가 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유일하게 표면화 되었다. 그러나 김일성 중심의 만주계가 무장력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세력의 도전은 중국이나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과 내전을 각오한 개입을 전제하지 않는 한 처음부터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다. 김일성은 10여 년에 걸쳐 항일 만주 게릴라 출신들을 제외한 모든 계파의 핵심 인물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1953년 3월초에 이승엽과 이강국을 비롯한 남조선로동당 출신 핵심간부 12명이 반국가, 반혁명 간첩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 곧이어 박헌영 마저 같은 혐의로 체포되었다. 박헌영을 제외한 이들에 대한 재판은 8월 3일부터 6일까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12명 중 10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나머지 두 명에게는 각각 15년과 12년 형이 선고되었다. 곧이어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 박헌영에 대하여 출당 조치가 취해졌다. 또한 이 회의에서는 주영하, 장시우, 권오직 등 남로당 계열의 중요 인사들을 당 중앙위원회에서 제명하거나 출당 처분했다. 박헌영에 대한 재판은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재판 결정을 내린지 2년 4개월이 지난 1955년 12월에야 그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박헌영에게는 간첩행위, 남한 내 민주세력 파괴행위, 정권 전복음모 등의 죄목이 적용되었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이 모든 행위에 대하여 죄를 인정했고, 재판부는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그의 사형이 언제 집행되었는지는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까지는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비밀리에 총살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김성보 외.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현대사』 (서울: 웅진, 2004), PP. 103~104.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남아있으며, 지배적인 주장은 김일성이 남로당을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아 이 주장에는 일면 타당성이 있다. 누군가에게 패전의 책임을 돌리지 않으면 권력의 정점에 서있던 김일성 자신이 책임을 져야 했고 그것은 김일성의 퇴장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최대의 정적이며 이질적이었던 남로당계열에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김일성에게 양면적 이득을 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이승엽과 박헌영의 사건은 북한정권에게 타격을 입히기 보다는 오히려 대내적인 단결과 외부 영향력의 차단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정권의 안정을 기하고 생산관계의 급진적 사회주의화를 토대로 한 고도성장을 밀고 나가는 정치적, 심리적 계기를 마련했다.
3. 김일성의 권력독점을 향한 첫걸음(1955년 8월~195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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