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한정책과 그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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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미국의 대한정책과 그 변화
강압적 태도
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무렵 만해도 미국은 군사 점령 이외의 어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한국에 진주한 것도 아니었고 한국에 대한 깊은 이해나 연민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8월 14일 청진과 나남에 소련군이 상륙 16일에는 더 남쪽인 원산에서 상륙작전이 감행되어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에 의해 장악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한반도 내에서 향후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것을 소련에 제의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9월 2일 한반도에서 38선 이북의 항복은 소련이, 이남의 항복은 미국이 접수한다고 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분할점령 제의는 일본군의 무장해체라는 순수한 군사적 목적이 아닌 전쟁에 대한 정치적 소득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되어 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9월8일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되어 질수 있다.
8월 15일 해방 후 일본총독부는 건준에 통치권을 이미 이양한 상태였고 총독부 건물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전쟁에서 얻어낼 정치적 소득을 규정지은 [일반명령 1호]에 의거 비밀리에 총독부에 미군이 진주하기 전까지 모든 체제를 유지하라는 통보를 보내고 이에 따라 총독부는 8월 18일 여운형에 대한 행정권 이양을 취소한다는 발표를 한다. 미군이 진주하기에 앞서 9월 7일 맥아더 사령부는 38선 이남에 대한 점령정책을 명시한 조선인민에게 고함이라는[포고문 제 1호]를 발표한다. 이와 함께 이틀 후에 발표된 [포고 제2호]에서는 "조선인으로서 포고명령을 위반한 자는 사형 등의 엄벌에 처 하겠다“ 는 경고를 하고 있다. 더욱이 9월8일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은 공군의 엄호 하에 완전무장을 하고 마치 적진에 상륙하듯 무시무시하게 인천에 상륙한다.
여러모로 보나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태도는 정복자의 모습이었지 해방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이 발표한 포고문에는 한국의 해방을 경축하는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오로지 복종과 강요와 저항에 대한 경고만이 번뜩이고 있다.
군정초기에 하지가 본국으로부터 받은 지침은 한국을 반공의 보루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 이외에는 달리 없었다. 즉 당시 미국의 정책집단은 완고한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있어 모든 사물을 오로지 반공주의란 색안경을 통해 보고 있었다. 이러한 편견으로 인해 미군정은 당시 남한의 실정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여 한국 민중의 민족적 독립과 사회의 민주적 개혁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한 채 자신들만이 남한 내의 유일한 정부임을 선언하였다. 그에 따라 ‘인민공화국’은 간단히 부정되었으며 궁극적으로 미군정의 무력에 의해 분쇄되었다.
기만적 태도
모스크바 3상회의안 거짓 정보 - 미국은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 소 영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의 원만한 실현을 방해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12월 말경 모스크바 삼상회의 소식이 남한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은폐한 왜곡을 자행하였다. 결국 진상은 철저히 가리워진 채 미군정에 우호적인 남한의 언론들은 한결같이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소련의 주장에 의해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했다는 어이없이 날조된 소식을 연일 대서특필했다.
미군은 해방 이후 친일 잔재 청산과 친일파 문제에 관한 민중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단순한 행정적 편이를 위하여 과거 일본이 이 땅위에 설치해 놓은 모든 기구와 정책들을 고스란히 인수하여 다시 사용하였다.
경찰 - 우선 미군정은 치안유지의 문제를 과거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경찰기구를 그대로 인수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경찰 간부의 8할은 과거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던 자들로 채워졌다. 경찰의 창설과 더불어 그 활동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온갖 법령체계가 난폭스럽게 등장하였다. 이렇듯 경찰은 전적으로 억압 기구였으며 그 후에 발생된 세 번의 비극(대구사건, 제주 43사건, 여순사건)의 원죄가 된다.
국방경비대 - 남한의 민중들은 조선인민공화국 창건과정에서 건국사업을 뒷받침하고 내외 친일세력으로 자신을 보위하기 위하여 각종 무장단체들을 결성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5년 10월 15일 경찰과 국군준비대의 충돌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 당국은 즉각 국방경비대 창설 작업에 착수하고 동시에 국군준비대를 강압적으로 해체시키고 그 간부들을 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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