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문헌연구] 고산가집의 책판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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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산가집의 책판 현황
Ⅰ. 고산가집의 간행과정
孤山 윤선도의 시조는 필사본과 판본으로 전하는데 필사본으로는 , , , 등이, 판본으로는 목판본 권6 下 소재본이 있다. 이 중 판본은 初刻板에 追刻 및 補刻이 이루어졌을 뿐 중간이나 3간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고산유고 초간본의 간행 연대는 분명치는 않으나 1780년(정조 4년) 이전으로 간주된다. 『고산선생연보』 부록 遺事에서
正宗 己酉 6월에 錦城尉 朴明源이 상소에서 水原府의 戶長家 後山이 萬古의 血食地가 된다고 했다. 이에 앞서 庚子年 봄에 임금께서 전라감사 徐有隣으로 하여금 고산집 10질을 내각에 印入케 하셨다. 正宗己酉六月 錦城尉朴明源上疏言 水原府戶長家後山爲萬古血食地 先時庚子春 上命全羅監司徐有隣 印入孤山集十秩於內閣. (『고산유고』 부록 유사)
여기서 “庚子年”은 정조 20년인 1780년이다 그러므로 1780년에 정조는 영릉을 수원으로 옮길 뜻이 있어서 『고산집』을 전라감사 서유인(1738~1802)으로 하여금 내각에 印景하여 들이게 했던 것이다. 이는 기존의 책판을 영인하여 가져오게 했다는 것이므로, 『고산유고』는 1780년 이전에 벌써 간행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산유고』 改刊에 대해 『고산선생연보』 부록 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丙辰 3월에 전라감사 徐鼎修에게 고산집을 영인해 바치도록 하여 刊本의 틀리고 빠진 것을 보시고 改板하도록 명하시니 감사 서정수가 친히 비장을 海南縣으로 보내어 白蓮洞 藏板을 縣衙로 옮겨 수십 판을 고쳐 새로 印登케 했으니 印景한 것은 15伴이었다. 丙辰三月 命全羅監司徐鼎修 印進孤山集 上覽刊本訛缺 命改板本 修親遺裨海南縣 運去白蓮洞藏板於縣衙 改數十板以改刊 新印堂聞所印凡十五伴. (『고산선생연보』 부록 유사)
정조 20년인 1796년에 전라감사 서정수가 임금의 명으로 『고산집』의 와결된 곳을 고쳐 改刊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간행한 고산유고가 6권 6책이었는데, 이 때 이후로는 『고산유고』의 대폭적인 개간이 없었으므로 고산의 가집인 권6 하권도 권6 상권과 함께 이때 追刻된 것이 확실하다. 『고산유고』 권6이 별집으로 詩賦 등이 補添된 것으로 보아 6권은 초간시에는 없었던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후 고종 35년인 1898년에 고산의 10세손 觀夏에 의해 고산의 연보와 유사가 활자본으로 간행되었고, 1935년에는 고산의 연보가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연보의 목판본 간행은 1932년에 士論이 峻發하고 諸宗의 정성이 모여 그 계획이 수립되었고 1933년에 일을 착수했는데, 주로 朽敗한 판을 改刻하고 자획이 마멸된 부분은 보각했으며 활자본 연보를 목판으로 改遞하였다. 이때 가집 일부분에도 보각이 있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고산유고』는 대개 이 때 인각한 판본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原刊本: 刊年 미상, 1780년 이전 간행.
改刻本: 1796년.
연보(活字本): 189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