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朱子의 교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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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朱子의 교육사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주희는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유교 교육을 받았다. 18세 때 대과(大科)에 급제했는데, 당시 그 시험에 급제한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35세였다. 그가 맡은 첫번째 관직(1151~58)은 푸젠 성 동안(同安)의 주부(主簿)였다. 이곳에서 조세·감찰 업무를 개혁하고 지방에 있는 서원의 서고(書庫)와 학칙을 개선했다. 또한 그때까지 없었던 엄격한 의례와 관혼상제의 규율을 제정하는 등 여러 개혁에 착수했다. 동안으로 부임하기 전에 이동(李)을 찾아갔는데, 그는 송 유학의 전통을 지킨 사상가로서 주희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1158년 주희는 그를 다시 방문했고, 1160년에는 수개월 동안 그와 함께 지내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11세기에 성리학자들은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 대항하여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창하면서 거의 1,000년간에 걸쳐 실추되었던 유학의 학문적·사상적인 우위성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이동은 그 가운데 가장 유능한 후계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 주희는 유교에 전념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 동안에서 주부를 역임한 뒤 주희는 1179년까지 다른 관직을 맡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에게 보낸 상소문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꾸준히 발표했다. 공적인 일에 관여하기는 했지만 조정의 공직을 맡는 일은 계속 거부했다. 그 이유는 당시의 권력자와 그들의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파당정치에 대해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한직을 계속 맡음으로써 교사와 학자로서의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가 이 시기에 보낸 공식 서한과 당시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던 친구·학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에 그의 사상과 학문은 점점 깊어졌다. 예를 들면 1175년에 그는 철학자인 육구연(陸九淵)과 유명한 철학논쟁을 벌였으나 서로 상대방을 설복시킬 수는 없었다. 육구연은 내재성(內在性)의 절대가치를 강조한 반면, 주희는 책을 통해 배우는 것과 함께 연구·조사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 같은 견해를 충실히 이행하여 그는 많은 저작을 남겼다. 정호(程顥)와 정이, 주돈이(1017~73), 장재(張載:1020~77) 등의 논문들을 편찬하면서 이 철학자들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고 이들의 철학을 집대성하여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켰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4명의 사상가들은 맹자가 죽은 후에 없어진 도(道)의 전통을 회복시켰다고 한다. 1175년 그와 친구 여조겸(呂祖謙:1137~81)은 이 4명의 사상가들의 저작에서 뽑은 문장들을 집대성한 〈근사록 近思錄〉을 편찬했다. 이 시기에 주희는 〈논어〉와 〈맹자〉에 관한 집주(集注)를 저술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나타냈는데, 이 집주는 모두 1177년에 완성되었고 그 후 중국·한국·일본 등의 지식인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주희는 역사에도 깊은 흥미를 보여 사마광(司馬光)의 역사서인 〈자치통감 資治通鑑〉의 축약과 재편집을 지휘했다
그 노력의 결과로 1172년 이 완성되어 동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읽혔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최초로 간행된 중국역사서로서 J.-A.-M. 무아리아크 드 마야가 쓴 〈중국통사 Histoire generale de la Chine〉(1777~85)의 토대가 되었다. 이 책은 나중에 정부에서 실행하는 도덕적 원칙의 귀감이 되었다. 1179~81년 장시 성[江西省] 난캉[南康]의 지사(知事)로 근무하면서 주희는 그 기회를 이용, 9세기에 건립되어 10세기에 번성했다가 그 뒤 폐허가 된 백록동서원을 재건했다. 주희에 의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딘 이 서원은 그 후 8세기에 걸쳐 그 명성을 유지했다. 서원들은 성리학이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1188년 주희는 황제의 인품이 국가의 안녕의 가반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도덕적인 정부를 강조한 책인 (대학:大學)에서는 황제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면 뒤이어 전 세계가 도덕적으로 변모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1189년 이 책에 대하여 중요한 주석을 달았고 평생 동안 이 주석 작업을 계속했다. 마찬가지로 1189년에는 (중용:中庸)에 대한 주석서도 써냈다. 대학, 중용 이 논어, 맹자와 함께 유교 교과과정의 기본서인 4서에 편입된 것은 대체로 주자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주희는 만년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고위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과감한 직언, 소신 있는 의견, 부패와 사리사욕이 판치는 정치에 대한 비타협적인 공격 등으로 인해 파면되거나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 관직으로 쫓겨났다. 그가 죽을 때까지도 정치적인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나 그가 죽은 뒤에 곧 회복되었다. 1209, 1230년에는 그에게 시호가 내려졌고 1241년에는 그의 위패가 정식으로 공자사당에 모셔졌다. 후대에는 주희가 비판했던 것보다 더 전제주의적인 통치자들도 조정에 대한 주희의 정치적 비판과 이성적인 자세에는 귀 기울이지 않으면서도 그의 철학체계 만큼은 유일한 관학(官學)으로 삼았는데, 이 같은 풍조는 19세기말까지 지속되었다.
2. 주자의 교육사상
가. 교육목적
주자는 유가사상을 계승하고 종합하여 명인륜(明人倫)을 교육목적으로 삼았다. 즉 인간과 인간사이의 윤리 질서를 밝히는 것을 말한다. 주자는 “옛날의 성왕은 학교를 세우고 모든 백성을 가르쳤다”라는 전통적인 유가의 교육적 관점을 이학(理學)사상으로 새롭게 해석하여 명인륜을 교육목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주자는 이(理) 혹은 천리(天理)를 우주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천리는 우주론적 개념으로 곧 인간의 성(性)에 해당한다. 그는 천리가 우주의 근원이며 성(性)임을 강조했다. 또 그는 인간의 性 을 이분화 하여 이기론(理氣論)에도 적용시켰는데 이(理)는 완전함과 선한 속성을 가지며 기(氣)는 선과 악 안정과 혼란 미와 추 등 상반되는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주자에게 있어서 성(性)과 심(心)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우선 그는 심(心)을 “본체”와 “작용"으로 구분하였다. 즉, 심(心)의 본체는 곧 도심(道心)이며, 심(心)의 작용은 인심(人心)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성(性)은 본래 선하나, 기(氣)의 악한 속성 때문에 악한 성(性)이 나타남을 설명한 것이다.
즉 인간의 본성(本性)을 회복하여 천리(天理)를 구하고 인심(人心)을 도심(道心)으로 개선시키는 것이 주자의 교육목적이자 교육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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