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작품세계의 특성과 그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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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태준 작품세계의 특성과 그전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상허 이태준은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서 부친 이창하와 모친 순흥 안씨 사이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기 이씨 가승”에 의하면 이태준은 소실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소실의 자식으로서의 자의식을 나타낸 부분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 그런 의식을 느낄만한 나이가 되기도 전에 고향을 떠났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부친 이창하는 字를 문규, 호를 매헌이라 하였고 철원공립보통학교 교원과 덕원감리서 주임을 역임하였다. 구한말의 개화파적 지식인이었던 상허의 부친은 당시 의병들에 의해 친일파로 오해받았고, 이는 고향을 떠나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던 듯하다. 그러나 부친은 1909년 가을 35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가장을 잃은 일가는 이듬해 고국으로 향하는데 어머니가 배 안에서 둘째 딸 선녀를 낳게 되어 예정을 바꿔 가까운 포구인 함북 배기미(梨津)에 내려 인근 소청거리에 정착하게 된다. 여기에서 어머님이 음식점을 경영하여 얼마간의 안정을 찾게 되자 이태준은 서당에 보내져 공부를 하게 된다. 1912년 어머니마저 죽자 세 남매는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상허 나이 9살의 일이다. 이들은 외조모 손에 이끌려 고향에 돌아와 친척집에 맡겨진다. 하지만 당연히 부모가 없는 고향은 결코 안식처가 되지 못했고, 주변 어른들의 동정과 양자로 간 친척집에서의 괄시는 어린 이태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겨 주었다.
1918년 사립 봉명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는 한달 후에 가출해 여러 곳을 방랑하다 원산 객주집에서 사환으로 정착한다. 2년 가량을 그렇게 보내던 상허는 다시 서울로 와 고학을 하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습작생활에 몰두한다. 21살 되던 24년에는 학예부장으로 활동하여 ‘휘문 제2호’에 동화 등 6편의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6월에 동맹휴교의 주모자로 지적되어 4학년 1학기에 제적당하고 만다.
이어 휘문고보 친구인 김연만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신문, 우유 배달 등을 하며 궁핍한 생활 속에서 나도향과 교우했고, 1925년에는 한 시골여자의 문란한 성생활을 치밀한 필치로 그린 를 『조선문단』에 투고하여 입선함으로써 문단에 처음으로 나서게 된다. 1927년 4월에 동경 상지대에 입학하지만 어려운 고학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그 해 가을 자퇴한다. 귀국해서는 모교와 여러 신문사 등에 취직을 알아보지만 실패하고 한동안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데뷔작 이후 그의 글이 다시 지면에 선보이는 것은 1929년 에 입사한 뒤이다.
1930년 5월에 이화여전 음악과를 갓 졸업한 이순옥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다. 작가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이 시기부터인데 1931년 중외일보 기자로 입사하면서 그 후 이 신문의 폐간과 함께 조선중앙일보에 학예부장이 되었고, 이화여전 등에 작문교사로 출강한다. 이 시기는 이태준 문학의 전성기로 그의 대표작 대부분이 이 때 창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인회』 구성에 앞장서는 등 사회적인 위상도 함께 드높아지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그는 매년 한편 꼴로 장편도 발표하여 경제적 안정도 얻는다. 이를 바탕으로 1933년에 성복동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지속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한다.
1933년부터 19378년에 이르는 시기가 이태준에게는 작가로서 가장 왕성한 필력을 보여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여유있는 시기로 보여진다. 이 시기에 이태준은비경향문학이 낳은 최대의 작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1937년에 접어들면서 시국은 급변하고 그 영향을 받은 그는 지금까지의 작품을 습작이라고 평가하면서 새로운 경향의 작품을 창작할 것을 다짐하기도 하였다.
1939년 『문장』지의 창간에 관여하고 책임편집을 맡으면서 이태준은 식민지 말기 우리 문학을 지키는 일에 남다른 공헌을 한다. 『문장』은 1930년대 초반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이른바조선주의 문화운동‘의 영향권 속에서 활동했다. 이 잡지를 중심으로 이태준은 이병기의 주도 아래 고전의 부흥에 진력하면서 의고주의적 예술 작품의 표현에서, 고전적 작품의 양식을 본뜨려는 주의. 상고주의(尙古主義). 고전주의(古典主義).
취향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태준도 몇몇 친일적인 글을 발표한다. 그 때의 심정은 해방 이후 발표한 에 비교적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러다 1943년 이태준은 고향인 철원 근처로 낙향하였다가 거기에서 해방을 맞는다.
해방 이후 이태준은 민족의 단결을 적극 주장하면서 스스로 좌익 작가들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부위원장을 맡고, 이후 1946년 7월경 월북하여 8월에는 소련을 방문하고 이 체험을 이라는 글을 통해서 발표한다.
월북 이후에도 작품을 활발히 창작하던 이태준은 1953년의 남로당 숙청 시에는 화를 모면했지만 1956년 소련파의 몰락과 함께 숙청당하고 만다. 숙청 이후의 행적에 대해선 현재까지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일설에 함흥 콘크리트 블록 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배치되었다가 66세 즈음에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 지구에서 사회보장으로 부부가 함께 살다가 사망했다거나, 50세 때 남로당파의 숙청이 끝난 가을 자강도 산간 협동농장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1960년대 초 산간 협동농장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Ⅱ. 작품세계의 특성과 그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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