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 철학 성리학 주희의 주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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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송대 철학 성리학 주희의 주자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송왕조는 문화적으로 우수했지만 군사적으로는 결코 한·당 왕조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언제나 이민족들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되었다. 송왕조가 북동의 퉁그스적인 여진족에게 수도를 잃었던 일대파국에 직면하여 마침내는 1127년 양자강 이남에 왕조를 재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송왕조의 전기는 북송(960~1126), 후기는 남송(1127~1279)이라고 불렀다. 풍우란. . 346쪽.
신유가는 두 개의 주요학파로 분류해왔다. 정호·정이 형제가 두 학파의 창시자인데 그들을 ‘이정’이라 일컫는다. 동생 정이는 주희가 완성한 정주학파 또는 ‘이학’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형 정호는 육구연이 계승하여 왕수인이 완성한 육왕학파 또는 ‘심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 양 학파간의 차이의 중요성은 정이·정호 시대에는 인식되지 못하였으나 주희와 육구연이 일대논쟁을 시작한 이래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같은책. 360쪽.
정이의 후기주장을 보면, 그가 점차 도학에다가 비교적 확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북송 후기부터 남송전기에 이르는 동안, 이정의 학문은 집정자들의 압제를 받아 영향을 크게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남송 건도와 원우 연간에 이르러 주희 등이 힘써 제창한 덕분에 이정의 학문을 비로소 성행하기 시작했다.
주희가 사용한 도학에는 광의와 협의의 두 의미가 담겨있다. 광의의 도학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공자가 개창한 유가전통을 계승한, 낙학을 위주로 한 사상체계를 가리킨다. 낙학은 바로 이정의 학문이다. 이정의 스승은 주돈이이고 그들의 외삼촌이자 학우였던 장재도 낙학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주희가 말하는 도학이란 주로 주돈이·장재·이정의 학문을 가리키며, 주희는 이들이 유학 도통의 새로운 발전단계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였다. 진래. . 34쪽
2. 주자의 생애
주자(1130~1200)는 중국 남송 시대의 철학사상가이다. 북송시대에 전개된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종합·계승하여 그 학문체계를 완성하였다는 점에서 성리학의 집대성자라고 할 수 있으며, 공자 맹자 이후 유학의 정신을 새롭게 드높였다는 점에서 신유학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주자는 24세 이전까지 유학적 소양을 기르면서 불교 특히 선종에 심취하기도 했는데 불교에 대한 이해는 이후 그의 성리학체계에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친다. 19세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과거에 급제하여 이후 대략 50년 동안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지방관료 9년과 중앙 조정의 40여일을 제외하면 모두 실무가 없는 한직으로, 학문연구와 저술 및 강론에 치중하였다. 주자는 24세에 이동을 만나면서 10여년간 이동의 가르침을 통하여, 유가사상과 불교·도가사상과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자각하고, 성리학적 입장에서 유가 경전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이때의 그는 자신의 학문 방향을 유학 특히 이정 계통의 성리학 중심으로 확립하고 이동의 공부수양론의 특징인 ‘조용히 앉아 마음을 가라앉혀 맑게 하여 천리를 체인한다’는 학문 방법론을 받아들인다. 주자는 34세 때 스승 이동의 죽음에 이어, 그의 학문 방법에 전환을 가져온 학문의 동료, 호굉을 만나게 된다. 호굉의 마음의 움직임에 중점을 둔 “먼저 성찰하고, 그 뒤에 함양”하는 공부방법을 수용한 주자는, 37세에 ‘중화구설’이라는 심성론과 공부수양론의 체계를 세우게 된다. 주는 40세에 중화구설을 의심하게 되고, 다시 이정의 서적을 검토하면서 자신의 심성론 및 공부수양론의 정설이라고 할 수 있는 ‘중화신설’의 체계를 확립한다. 이때 이정 가운데 정이의 학설에 주로 그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는데 심·성의 개념 뿐 아니라 공부수양론을 재검토했다. 주자는 40세에 이르러 비로소 이정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기반으로 그 자신의 학문체계를 확립하였다. 40세 이후 즉 중화신설 확정 이후 주자의 학문과정은, 중화신설을 기반으로 하고 정이의 철학체계를 위주로 하여, 북송의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종합·계승하면서 자신의 철학사상체계를 더욱 견고하고 풍부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었다. 40대에 주자는 왕성한 저술활동을 통하여 선진 유학과 성리학의 핵심적인 문헌들을 자신의 사상체계로 정리·해석하여, 명실 공히 성리학의 집대성자로서의 업적을 남기고, 이를 기반으로 한 저술활동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지속되었다. 50대에 들어서면서 주자는 다시 지방관리 생활을 시작하여, 60대까지 몇 차례 지방행정의 실무를 담당한다. 또한 관리로서 민생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민심의 교화를 위한 교육활동에 더욱 힘을 쏟았다. 주자는 53세에 사공파의 진량을 만나 ‘왕패·의리논쟁’을 벌이는데 이 논쟁을 통하여 성리학적 역사관과 윤리의식을 더욱 견고히 했다. 주자는 65세에 황제의 초빙을 받아, 환장각대제 겸 시강이라는 벼슬을 받아 유가경전을 강의하고, 황제의 자문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러나 황실의 재정낭비와 권신들의 미움을 받게 되어 40여 일 만에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뒤이어 조정의 정치투쟁에 말려들어 탄핵과 파직 및 학술활동 금지라는 수난을 겪게 된다. 이러한 억압은 그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지만 그의 사후 정권이 바뀌면서 그의 학문에 대한 탄압은 차츰 풀리기 시작하고 1241년에 북송의 4명의 성리학자와 함께 공자 사당에 배향되어 유학의 도통을 잇게 된다. 장승구 외. . 247~253쪽
3. 주자의 철학사상
(1) 이기론
주자는 천이 만물을 낳는 마음의 주재 작용 즉 조화·발육을 천도유행이라 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기화유행과 천리유행이라고 하였다. 주자철학에 있어서 이른바 리와 기는 천도유행을 서술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천은 만물을 생성·조화하는데 있어서, 그 자체가 구비하고 있는 무한한 기를 재료로 하여 만물을 끊임없이 생성·변화하고 일체의 자연현상을 일으키며, 리로서 만물이 각기 그 본질·본성을 갖게 하고 일체의 자연현상 또한 조화롭게 운행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주희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사물들을 만들어 놓은 것은 바로 이 이치라고 했다. 그리하여 정주학파에 의하면 모든 범주의 대상이 마음을 가지지 않더라도 그들 모두 자기 자신의 독특한 본성, 즉 이치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사물은 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도 벌써 사물의 이치는 존재한다. 의 한 문구로 알 수 있다.
문: 천지가 아직 개벽하기 전에도 후세에 있을 모든 사물들이 그 곳에 존재했었는가? 답: 오직 이 이치만이 존재했었다. 이치는 언제나 존재한다. 즉, 이치는 영원하다.
또한 주희는 말한다.
우주(천지)에도 이치도 있고 기운도 있다. 이치란 형이상의 도이며, 만물을 생성하는 근본이다. 기운이란 형이하의 사물이며 만물을 생성하는 재료다. 그러므로 인간과 사물은 생성될 때에 반드시 이 이치를 품수한 연후에야 본성을 가지며 이 기운을 품수한 연후에야 형태를 갖는다. 이 기운은 작용하기 위해여 이치에 의존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기운이 모이고 흩어지고 할 때 이치도 역시 거기에 있다. 대개 기운은 응결하여 사물을 만들 수 있는데 반하여 이치는 감정도 없고, 헤아리는 것도 없고, 조작하는 힘도 없다. 이치는 하나의 깨끗하고 텅빈 넓은 세계이며, 형태도 없고 조작할 줄도 모른다. 그러나 기운은 한데 엉겨모여 사물을 생성시킬수 있다. 그러나 이 기운이 있으면 이치는 바로 그 가운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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