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이 될 수 있고 사회발전을 해나가는 데서 적극적이고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면, 그 지배층이 그렇게 반민족적인 행위, 외세추종적이고 외세의존적인 짓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과정에서 친일파, 친청파, 친미파, 친러파 등이 생겨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가 되지
후작(Marquis) 6명, 백작(Count) 3명, 자작(Viscount) 22명, 남작(Baron) 45명인데 김석진 등 8명이 남작의 수령을 거절했다. 이후 1920년대로 들면서는 이완용이 백작에서 후작으로, 고희경과 송병준이 자작에서 백작으로 승급사고 이완용의 차남인 이항구에게 추가로 남작이 수여된다. 이리하여 작위를 받은 최종
친일파 99인의 명단 중 언론분야의 친일파를 대상으로 그 범위를 한정했다. 이는 ‘언론’이라는 생각과 사상을 담아내는 그릇을 통해서 그 ‘언론인’이라는 사람들은 시대를 어떻게 읽어내었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언론의 두 핵심을 담당했던 동아일보의 김성수와 조선일보의 방
친일을 하게 되었던 이유와 그 논리적 합리화, 그리고 이후 그들이 대안으로 선택했던 만주국행이 가지는 의미를 알아 보는 것은 식민지 당시 한국인의 세계인식을 이해하는 측면에서 꼭 필요한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오늘날의 친일잔재 청산 문제에 대해서도 어느
친일파 이완용의 후손인 이윤형씨가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땅 712평(당시 시가 30억 원)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내 승소한 이래, 지금까지 30여건의 크고 작은 친일파후손 재산 찾기 소송이 이어져왔으나 법원은 97년 ‘반민족 행위자의 후손이라고 해서 법률에 응하지 않고 재산권을 제한 박탈할 수 없
1.서론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로서 식민지 시기의 반민족적 범죄와 유산을 청산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유럽 국가들도 나치에 협력한 자들의 문제를 일찍이 해결하였고, 북쪽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은 국가 수립과 함께 해결되었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친일파 청산의 문제가 독립과 국가
해방이 되자 일본 자본가가 철수함으로써 자본가 없는 노동자 계급형성이라는 계급구조와 계급형성상의 불균형 초래
(4) 토착 지배계급인 조선인 지주와 자본가의 대부분은 식민지 통치기간 친일 부역행위를 했기에 해방후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를 획득할 수 없었음
(5) 조선인 지배계급은 어디까지
후 굴절된 ‘한미 관계’의 정상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져왔다. 특히 2002년 경기도 의정부에서 발생한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은 반미(反美)감정에 불을 지폈고 이를 계기로 불평등한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의 즉각적인 개정을 요구하는 촛불시위는 수개월 동안 연일 전국
개화기 근대적 지식인으로서 한말 개화, 자강 운동의 핵심인물이었던 윤치호. 일제시기 여러 단체의 주요직에 있었으며 조선감리교의 대부였던 그를 대부분 친일파라고 평가한다. 그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주로 1938년 이후 나타난 행적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견해는 38년의 적극친일행위
친일행위를 벌인 '이재극'이라는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보호해 달라는 친일파후손의 소송에 대해, "민족의 자주독립을 부정하고 일제에 협력한 반민족 행위자나 상속인이 3․1운동 정신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헌법기관인 법원에 반민족 행위로 취득한 재산보호를 요구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