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明이 부친을 찾아가는 대목은 마련되지 않았다. 또한, 東明이 박해를 피해 ‘도망’한 것은 ‘집 떠나기(出家)’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신성한 혈통의 인물을 기존 집단에서 수용하지 않은 탓에 주인공이 겪어야 할 시련의 단계로 마련된 것이다. 동명신화를 차용하여 만들어진 것이 주몽신화인데, 주
東明聖王)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이 주몽(朱蒙)이다[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하였다]. 그의 나이 겨우 일곱 살이었을 때에 남달리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라고 기
東明王) 신화는 435년 편찬된 위서(緯書),
고려 인종 23년
(1145년) 김부식이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 13세기말
에 일연에 의해 편찬된 삼국유사
(三國遺事)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화의 내용이 가장 풍부하고 잘 정돈된 것은 고려 고종 28년
(1241년)
에 간행한 이규보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
東明社)를 설립, 주간지 《동명(東明)》을 발행하면서 국사연구에 전념했다. 1924년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곧 사임, 이듬해 《동아일보(東亞日報)》의 객원이 되어 사설을 썼다. 1927년 총독부의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위원이 되고,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가
東明帝繼北扶餘而與. 立都于卒本州. 爲卒本扶餘. 卽高句麗之始祖.”
라고 하고 있고, 동부여에 대해서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상이었던 아란불이 꿈을 꾸었는데 하느님이 내려와 이르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하려 하니 너는 이곳을 피하라. 동쪽의 바닷가에 가엽원이라
東明)』기자로 활동
1922년 단편「암야(闇夜)」,「제야(除夜)」. 평론 「개성과 예술」등을 『개벽』지에 각각 발표. 「묘지(만세전)」를 『신생활』에 연재(7~9월호 3회로 중단)
1924년 최남선(崔南善)이 창간한 『시대일보(時代日報)』의 사회부장으로 재직
단편 「금반지」(『개벽』) 발표. 「묘지(만
東明學院)을 설립하여 해외에서 유학하려고 하는 학생들에게 준비교육과 민족관을 가르쳤으며, 그해 12월 미국에 건너가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하고, 이상촌(理想村) 가입자와 투자금을 모집했다.
1926년 다시 상하이로 가서 흩어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진력하였으며
東明王篇)」 등을 지었다. 그 뒤 최충헌 정권에 시문(詩文)으로 접근하여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고 32세부터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권력에 아부한 지조 없는 문인(文人)이라는 비판이 있으나 대몽골 항쟁에 강한 영도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정권에 협조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는 우리 민족에
문학양식을 실험하고 새로운 시학(詩學)을 수립.
⑤ 신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통해 자세한 주석과 함께 호한한 필치로 구성된
장편 영웅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창작하는 역사의식을 보여줌.
[2] 시대배경
① 광종 - 건국공신인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과거제와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문신들을
않고 현존하지고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김부식이 『삼국사기(三國史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등이 편찬될 때 『삼국사(三國史)』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