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불 교체기에 고뇌하는 사상가로 그리고 영원히 기념될 만한 작품을 남긴 문학가로 일생을 보냈다. 그의 작품집인 「금오신화」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해명하기 위해서는 이를 전기소설 일반의 보편성과 연결지어 살피는 작업과 더불어, 당대의 시대 상황이나 작자의 삶과 연결지어 살피는 작업이 함
유불도무 4개의 종교화를 묶어 놓고 별화(別畵)들은 따로 모아서 그것을 생활화 속으로 몰아왔다. 그 생활화 속에는 효자도니, 문학도니 하는 유교계통의 화제가 있고 수성노인도(壽星老人圖)니 팔선도니 하는 도교계통의 화제가 있고 심우도(尋牛圖)나 불족부(佛足符)와 같은 불교 출생이 있고, 청룡
유불도 이외에 「한」의 철학을 넣어다는 점에서 독창성을 띤다.
“철학은 어떠한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의 학으로서 성립하려고 함에는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사상이 필요하다. 이 같은 주체적인 독립된 사상이 없이는 자기 철학이 성립되기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 성립된다고 하더라도 그것
유불도 삼교를 절충하는 사상풍조가 등장하면서 역사의식도 유학적이기보다는 종교적 신비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이시기에 저술된 이규보의 『동명왕편』(1193)은 이시기 집권층 지식인의 역사의식을 상징적으로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를 쓴 목적은 당시 고려에 대하여 군신관계를 강요
유불안하니 오안이 족이라야 즉견여래니라.
여래에는 육안이 있고, 천안이 있고, 혜안이 있고, 법안이 있고, 불안이 있으니 5안이 충족되면 여래를 보게 된다.
弟子鑒心에曰,我祖鑒人神妙가 在總訣第一節二歸三昧之理나,未易推測일새,不敢妄解하고,聊以臆見으로 略釋第二第三第四節之意하노
유불선 삼교라고 하지, 유불도 삼교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반에서는 도교와 신선도를 흔히 같은 단어로 이해한다. 도교가 백성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유교의 성리학처럼 배타주의나 편향주의로 나아가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조화로움을 지녔기 때문이다.
한편, 도교가 종교의
유불상교의 기연을 맺기도 하였다. 1805년 겨울에는 주역연구자료가 담긴 경함을 고성사로 옮겼으니, 여기에는 그를 위한 혜장선사의 깊은 배려가 스며 있었고 이로부터 두 사람의 인연은 날로 깊어갔다. 한편, 9개월만에 다시금 이학래 집으로 옮겨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옮기게 될 때까지 약 1년 반 동
유불도 삼교의 근원이 동일하다는 인식도 형성되고 있었다. 도교서적은 불교서적보다 더 철저히 금지되었다.
1. 불교
1) 왕권과 불교 : 왕조 초기
고려 말 문벌체제와 결탁한 불교세력은 잦은 불교행사와 사원 건축을 통해 국가재정을 낭비했다. 이성계가 정치권을 장악하면서 성균관을 중심으로 한
유불교체를 통해 신유학이 지배 이념으로 확립되는 사상적 전환과 함께,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 찬탈을 하면서 집권 세력의 급격한 재편이 이루어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세조의 왕위 찬탈은 조선왕조가 지배 이념으로 내세운 신유학의 가치 규범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당대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