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리기도 했다.
1773년 3월 정조는 사회 모순을 완화하기 위하여 서얼허통법을 발표하고 서얼들을 하급 관리에 임용하였다. 1779년 3월 박제가는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임명되었고, 후에 부여 현령, 오위장·영평 현령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보수적 집권파의 눈 밖에 나면서 1801년 경원으로 유배
사상을 오염시키고 반 유가 사상을 전파할 위험성이 있다는 판단 하에 결국 전통 고문을 어지럽힌 다는 이유로 ‘문체반정’을 감행했다. 소품문을 창작하던 백탑파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박지원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고 정조가 출제한 과거 시험에 소품체 과문을 제출한 성균관 유생 이옥을 퇴학시킨
Ⅰ. 서론
해방 후 일제 식민사학의 정체성 ․ 타율성 이론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활발히 연구된 분야 가운데 하나가 실학이다. 실학은 대체로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 발전에 상응하는 사상, 즉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를 반영하는 사상으로 보아 그 성격을 ‘민족적’, ‘근대 지향적’이라
박제가는 영조 26년 승지 박평의 서자로 출생하였다. 서자라는 신분적 제한으로 불우한 시절을 보내었으며, 부친을 일찍 여의어 그의 가정의 생활고는 두드러졌다, 하지만 모친의 정성스러운 뒷바라지로 인해 박제가 자신은 생활과 관련한 어려움은 크게 겪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행색을 보고
애니미즘(animism)
무생물계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세계관. 물신숭배(物神崇拜)·영혼신앙(靈魂信仰) 또는 만유정령설(萬有 精靈說)이라고도 번역되는 애니미즘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아니마(영혼)에서 나온 말이다. 영국의 인류학 자 E.B.타일러가 《원시문화》(1871)에서 이 말을 처음 사용하였는데, 애
성리학을 교조적(敎條的)으로 만들어 주자의 비판자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여 탄압하는 등 성리학적 사상에 입각한 사상 통제를 강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민족의 생활을 지리멸렬로 만든 것은 위에서 언급한 사회경제적 토대뿐만이 아니었다. 물적 토대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짓기 때
박제가(1750-?) 등이 중심이 된 북학파가 바로 그것이다. 권력에서 소외된 기호(畿湖) 남인(南人) 중심의 성호학파가 유형원을 계승하면서 토지 및 행정기구 등 사회제도의 개선에 치중한다는 측면에서 일명 '경세치용학파 經世致用學派'라 지칭하고, 지배계층인 노론계열의 북학파가 상공업의 유통과 일
궁핍상과 지방행정의 부패나 맥상을 생생하게 목격하였다. 뒷날 그가 농민대중을 위한 진보적인 정치 경제개혁안을 구상 발표하게 되는 학문적 기틀은 실로 이때 단단히 다져졌던 것이다. 강직한 성격을 타고난 다산은 탐관오리를 발견하면 관직의 고하를 불문하고 색출 처단하였다. 이로 인해 백성들
◎실학의 개념과 형성배경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루려는 일련의 사회개혁사상이고, 수기치인을 위한 실정, 실용 실증 등 실의 학문으로서 유학의 본령을 되살리기 위한 사상체계이다. 그리고 정통 성리학의 세계 질서관인 화이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