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초기 고려초기의 불교에 대한 연구는 김영수 선생의 五敎九山說 이후 60-70년대 시대구분논의가 진전됨에 따라 나말여초를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전환기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 역사학계의 연구는 신라 하대 수입되어 재지세력들에게 호응을 얻기 시작하며 사회적
∙ 나말여초 시기의 불교사상 연구
- 1960~70년대 : 선종의 양적 성장에 주목
- 1980년대 : 교선양립, 공존에 주목
∙ BUT, 사상과 시대의 관련성 규명에 소홀
-> 시대 혹은 정치와 연관, 총체적인 접근이 필요
※ 참고 논문
∙ 김두진, 1982, 「王建의 僧侶結合과 그 意圖」
- 왕건
초기의 억불정책에 대응한 불교계의 동향과 민간신앙의 흐름을 알아봄으로써 조선 후기의 사상적 측면에서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Ⅱ. 조선후기의 불교
1) 조선전기의 억불정책
조선왕조 개창 직후 건국 주도 세력들은 성리학적인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열의에 불탄 반면, 고려사회를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 명의 압력 등으로 인한 대외적 모순과 농장의 확대와 불교교단의 폐해, 민생의 피폐 등으로 인한 대내적 모순을 극복하면서 성장하였던 신흥사대부는 불교에 대항하는 개혁사상으로서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성리학은 당시 송에서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던 불교와 도교를
정책은 전국 획일적 관점이 아니라 반드시 각 지역의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서 실시되어야 한다. 또한 농촌 지역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도시와 농촌간의 교류를 확대하기 위한 방안이 마련되어야한다.
이와 같은 정책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먼저 농업 보호에 대한 국민의 광범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고려,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여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복지겸(卜知謙) 등의 추대를 받아 철원(鐵圓:鐵原)에서 즉위하여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다음 호족세력 통합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崇佛政策) 등으로 세력구축에 힘썼다. 이때 한반
정비하여 실질적인 국가의 면목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고국천왕(179~197)
왕위의 형제 상속제를 부자 상속제로 바꾸며 왕권을 키웠고,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진대법을 실시하는 등 현정을 베풀었다. 진대법은 백성들의 빈곤을 덜어 주고 농민층이 귀족 세력에 예속되는 것을 막아 왕권을 강화하
불교는 성속이원론(聖俗二元論)의 사회관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사회관은 모순이 가득 찬 세속사회[俗, 世間]와 그것을 변혁시킬 성스러운 사회[聖, 出世間]로 양분하였음을 의미한다. 세간에 대하여 도덕적 우위를 갖는 출세간은 현실적으로는 불교교단의 모습으로 존재하며, 궁극적으로는 부처나 보
1. 중세의 세계
10세기 초 중국에서는 당이 멸망하고 5대 10국이 흥망하는 가운데 사대부라는 새로운 지배층이 성장하였다. 5대의 혼란을 수습한 송은 중앙 집권적인 황제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과거 제도를 강화하여 문반 관료 중심의 문치주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송은 국방력의 약화로 북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