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치되어 있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修多羅藏)'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法寶殿)'이라 한다. 규모는 앞면 15칸, 옆면 2칸의 단층 우진각지붕집 양식이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건물은 큼직한 부재(部
명종2년(1172)에는 도선국사비가 건립되었고 충렬왕(1313~1330)때 원소암(圓炤庵)이 중건되었다. 조선초인 세종 6년(1462)에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8가람 81암자의 모든 당우와 보물들이 일시에 불타버렸고 인조 8년(1699)에 벽암선사와 그 문도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돋을 새김하여 봉안했다. 신중은 여러 신을 말하는데 불법을 수호하는 위타천이 중앙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며, 제석천이 그 위에 배치된다. 그리고 사천왕들은 하단에 배치되고, 위 양쪽에는 금강역사가 배치된다. 그러나 골굴사의 신중단은 제석천이 중앙에, 사천왕은 양쪽 끝 아래 위에 서 있다.
배치를 하기 위해서, 또는 프로그램의 성과를 평가하기 위해서 등의 여러 가지 목적을 지닌다. 교사들이 교수 활동과 연계된 진단을 한다는 것은 장애 유아의 현행수준과 강․약점, 또는 필요나 욕구 등을 평가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사들은 교육진단을 계획하고 수행할 때 그 목적이 교수
가람을 유지하기 위한 자산을 생간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7세기 무렵에는 승려의 사유재산이 형성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수입인 祈禱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미투리나 종이 등의 생산에 참여하거나, 때로는 田地와 堤堰을 개간하면서 재산을 형성해 나갔다. 즉 조선후기 불교의 경제활동은 궁
배치
이 관점에서는 요사(寮舍) 사찰 내에서 금당이나 삼문(三門.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을 말한다) 외에 승려의 생활과 관련된 건물을 아울러 이르는 말.
또한 천왕문과 불이문 사이에 있다. 그 이유는 스님은 아직 욕계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수련을 통하여 일반인에 비해서는 불국정토에 가
배치되는 석물(石物)의 수가 다르게 조성되었던 것이다. 우선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원은 왕의 사친(私親)과 세자와 세자빈의 무덤을, 묘는 왕세자를 제외한 대군 ․ 공주 ․ 옹주 ․ 후궁 등의 무덤을 지칭한다.
능은 좌향(坐向)을 중요시하는데 좌(坐)란 혈의 중심이 되는 곳이고, 좌의
배치하여 부의식속에 잠재되어 있는 환상의 세계를 일깨운다.
그는 콜라쥬를 설명하는 가운데 ‘시각적 이미지의 연금술’ 이라고 부르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이 시각적 이미지의 연금술을 “인물과 사물에 있어 그 물리적, 해부학적 양상에 어떤 수정을 가하거나 또는 전혀 수정하지 않으면서 총체
것을 판단된다. 신라의 영향에서 벗어난 고려시대에는 백제계 석탑의 양식이 부활 재생되어 백제의 옛 영토에 집중 배치된다.
백제의 옛 도성인 부여를 중심으로 부여에 가까울수록 전형적인 석탑형태에 충실하였고, 부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건립될수록 전형탑에서 일탈된 조형상태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