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람배치
(1) 해인사의 입지성
해인사의 가람배치를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해인사의 입지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해인사의 입지성이 중요한 이유는, 창건 설화에 입지 과정이 매우 중요하게 설명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인사의 주변 환경이 단순히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해인사가 입
가람배치
1. 9세기경의 화엄십찰
범어사는 화엄십찰의 성립기인 9세기경의 가람배치를 유추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는 사찰 중의 하나이다. 화엄십찰 중 9세기 이전에 소규모 암자형식으로 건축된 부석사나 화엄사와는 달리 9세기경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당탑가람형식을 갖추
가람의 배치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나타나는데 연등회, 사찰연기설화, 팔관희 등이 그것이고 반대로 무속신앙 내에도 많은 불교적 요소가 융화되어 있다. 무당의 巫衣, 巫具, 巫神圖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불교는 한반도에 들어오기 위해 자신을 토착신앙과 융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상호적으로 토착
1) 가람배치
화엄사는 지리산 지맥인 원사봉과 형제봉 사이의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골짜기의 중앙에는 대웅전과 각황전이 자리 잡았고, 각황전 뒷산을 오르면 4사자 3층 석탑과 공양탑이 세워진 언덕이 나오는데 이 부분을 효대라고도 부른다. 대웅전과 삼전 사이에 난 오솔길을 따라 북쪽으로 오
자세히 보지도 않았다. 대학교에 와서 역사학을 전공하면서 좀더 자세히 보았을 때는 새로운 느낌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 문화적으로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이루어진 훌륭한 건축물이다. 이번 글에서는 불국사창건과 가람의 배치 그리고 불국사에 있는 유물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신라 진흥왕의 황룡사 창건은, 백제의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는 직접적인 자극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점을 위의 무왕의 기록에서는 선화공주가 왕비로서 왕에게 저의 평생 소원입니다 하면서, 미륵삼존이 나타난 큰 못 위에 못을 메우고 대가람을 지을 것을 청했고 무왕은 이를 허락한 것
중심으로 하는 불교의 세계관에 따라 일정한 법칙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전통 사찰의 대부분은 산지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산지형 사찰을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산지에 위치해 있는 사찰의 각 조형물 배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의 세계관을 살펴보아야 한다.
◈ 사찰 건축의 개관
1. 사찰의 기원
사찰의 어원은 상가람마이다. 불교교단을 구성하는 비구(남자승려), 비구니(여자승려), 우바새(남자신도), 우바이(여자신도)의 사부대중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즉 많은 승려와 보살들이 불도를 수행하는 장소로서의 공간적 의미와 더불어 건축물 자체를
고대국가의 발생 이후 불교는 한반도에서 중요한 사상적 위치를 점해 왔다. 특히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과 왕권을 한층 강화하여 중앙집권적 국가로 나아가려 한 고려에서 불교는 국가의 근간을 마련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억불정책
3. 가람규모와 배치의 변화
황룡사지는 발굴조사 결과 가람 규모와 배치의 변화가 세 번 있었음이 밝혀졌다. 창건 당시의 1차 가람은 중문과 남회랑, 동·회랑을 놓아 백제의 일탑일금당 형식이었다. 그러나 곧 5미터에 가까운 장육존상을 모시기에는 금당이 너무 작았던 것이다. 2차 가람은 645년 구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