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에서의 백제유민
백제가 서기 660년에 신라와 당나라 군사에게 멸망시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일본에 있던 그의 누님인 제37대 '제명(齊明, 사이메이)천황'에게 구원군을 요청했으나 도중에 제명천황이 죽자, 일찍이 왜로 와 있던 의자왕의 아들 인 중대형(中大兄, 나카노오에)이 이끄는 구원
1-1) 唐으로 간 백제 유민들
당시 당으로 보내진 이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의자왕과 태자 융 등 일부 귀족에 대해서만 그 행적을 알 수 있을 뿐 대부분 포로들의 행적은 알 길이 없다.
의자왕은 당에 끌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사하였고, 태자 융은 당의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인
4)가야와 왜의 관계
가야지역 특히 금관가야의 전신인 狗那韓國(한국)(구나한국)은 이미 기원전부터 왜의 대중국교섭의 중간 기착지로서 역할을 한 것이 삼국지 위서 왜인전 등에 의해서 확인되는데, 이는 가야가 일찍부터 왜와 활발한 관계를 가져왔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삼국지 한조의
Ⅰ. 백제시대(백제)의 역사
1. 한성시대(漢城時代) BC18-AD475
온조(溫祚)가 서기전 18년에 하남위례성에 작은 부족국가인 백제를 세웠다. 백제 초기의 지배계급은 북에서 남하(南下)한 유 이민(流移民)의 집단이 한강 유역에 정착한 사람들이므로 고구려계임을 알 수 있다. 초기 백제의 도읍지는 한강 유역
고구려는 정복국가인 동시에 문화국가이다. 고구려는 기마를 이용한 우수한 기동력과 철기를 바탕으로한 국력을 배경으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통합한 동방의 강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고조선 문화를 계승하여 유기 신집으로 대표되는 역사서를 비롯하여 찬란한 고분벽화 등 수많은 문화 유
백제문화라는 역사적 향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고대사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은 한국사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그것에 비교될 만큼 크고 막중하다. 지금 많은 학자들이 저마다 다른 견해를 갖고 있고 심지어는 민족적 대립감정과 결합하여 거의 허구적인 이론까지 제시되기
1. 백제의 성립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온조(溫祚)를 중심으로 한 건국설화와 비류(沸流) 중심의 건국설화가 함께 실려있다. 온조 중심의 건국설화에서는 졸본부여의 둘째딸과 주몽 사이에서 온조와 비류가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부여에서 주몽의 아들인 유리(琉璃)가 찾아와 태자가 되
한국사에 있어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4세기에서 7세기 중엽에 걸쳐 한반도를 3分하여 세력을 다투던 시대를 삼국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는 3국이 각기 건국 초기의 부족국가적(部族國家的)인 틀에서 벗어나 고대 민족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때부터 고구려, 백제가 멸망하고 통일신라가 개막
1. 일본이 숨쉬는 곳 - 백제
부여에서 외국인이 묵어갈만한 숙소는 부여 유스호스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부여는 오래 전부터 일본인 관광객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곳이다. 부여 유스호스텔 계단과 복도에는 여기를 다녀간 수학여행단의 단체기념사진이 죽 걸려 있는데 그들은 무엇 때문에 불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