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선을 앞세워 중국을 무력으로 굴복 시켰다는 사실을 듣고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1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세가 더욱 궁핍해지자 방랑생활을 하였다. 유랑생활을 하면서 장사와 의술, 복술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으며 불교와 서학, 제자백가서등 두루 섭렵하기도 했다. 최제우는 세상을 구
이양선 출몰과 병인·신미양요 등등 국내외적으로 전통사회에 대하여 큰 충격이 가해진 시기였다. 이로 인해 대내외적인 위기의식이 고조되었고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더더욱 강화되었다. 1870년대 들어 개화론자들의 개화자강론, 개화사상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양선ㆍ황당선이 빈번히 우리 해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정부에서는 한결같이 쇄국을 고집하고 거절하였다. 이 시기에는 무력충돌이나 직접적인 위협이 가해지지 않았던 것이므로 양이에 대해 별반 두려움을 갖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철종(1850~1863) 말년부터는 달라졌다. 외세의 충격
이양선(異樣船)’이라고 불리는 서양의 증기선들이 조선 연안에 나타나 서양 열강의 조선 침입이 임박하고 있음을 알리던 때 조선에서도 서학의 포교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늘어가는 천주교도의 급속한 증가로 인해 위협을 느끼던 조선조정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명분으로 1839년 천주
-서론-
개화기, 이양선의 출현 이래, 조국이 광복하기에 이르기까지의 우리 역사는 격동의 역사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 백, 수천 년간 굳건히 자리 잡고 있던, 중화 주의적 세계관이 이 짧은 시간에 붕괴해 버리고 새로운 세계와 조우하여, 세계 속의 한국에 대한 뼈저린 아픔과 고민의 성
이양선 출몰과 병인양요․신미양요․운요호 사건 등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왕조의 존립은 물론 민족생존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조야할 것 없이 지식층사회에서 국정개혁과 구국책을 모색하였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상은 개화사상과 위정척사사상이었다.
2. 개화기의 국
1.
이 글은 근대 이후 조선인의 눈에 비친 외국인과 외국문물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조선 초기 이후 말기에 이르는 과정 속에 나타난 외국인과 외국문물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이는 이양선의 출몰 이후 근대적 시각에서만의 외국인을 다루는 것보다 좀더 폭넓고 상세한 기술을 하기 위해서이
이양선의 잦은 출몰과 북경의 함락소식은 조선사회를 뿌리 째 흔들어 놓을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에 조선왕조는 서양의 통상 요구를 차단하면서 전통적인 체제를 고수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서구열강과 일본의 조선에 대한 팽창주의정책은 가속화되었으며 조선은 점차 위기에 놓이게 되었
이양선침입소동, 서구열강의 개항요구에 대응하는 정책의 표시였다. 그러나 사실상 쇄국은 조선이 개국하면서부터 취해온 일관적인 정책이었다. 이러한 쇄국의 배경에는 수많았던 한반도의 약탈과 수난의 역사가 있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쇄국의 역사는 한반도에 있어서 단지 근세에서